[포토맥 칼럼]나의 6.25 전쟁 체험기
- senior6040
- 2020년 6월 23일
- 5분 분량
[워싱턴 중앙일보]기사입력 2020/06/22 김동훈 / 포토맥 포럼

금년은 6.25 전쟁이 일어난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다시는 이런 민족의 참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온 국민이 최선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여기 저의 체험담을 간단히 기술함으로서 6.25를 여러분이 이해하시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1. 저는 1950년에 동대문구 신설동에 살고 있었으며, 종암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종로구 화동 언덕에 있는 아름다운 교사에서 중학교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전국 각지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실력 있는 동문들과 함께 훌륭한 교사진 아래에서 진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교내 각종 특별분야의 모임에서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저는 원예반에 들어가 선배님들을 모시고 온실에서 여러 가지 화초를 다루며 일하였던 추억이 생생하게 또 오릅니다. 그러다가 1개월이 지나니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2.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북한 인민군이 남침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요일 낮에는 휴가 장병들은 즉시 귀대하라는 라디오 방송이 계속 나오고 길거리는 귀대 장병들을 싫은 트럭이 달려가는 등 긴장감이 가득 찼습니다.
3. 6월 26일 저는 학교에 등교하였습니다. 역시 긴장감이 돌고 한 때는 북한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고 하여 운동장에 뛰어 나가 하늘을 살펴보기도 하였는데 저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학교당국에서는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등교하지 말라고 하면서 집에 가라고 하여 집에 오는데 국군을 만재한 트럭을 여러 대 보았습니다.
라디오에서는 국군 장병이 침략을 저지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고 집에 있으라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4. 6월 27일에는 포성이 들려 오기시작하고 저녁이 되니 점점 포성이 커지는데, 밤이 되니 북쪽 하늘이 뻘겋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의 집이 신설동에 있었는데 후퇴하는 몇 명의 국군장병을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국군장병 중 한명은 무기도 없이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고 불평을 하고 있었습니다. 28일 새벽에는 포성이 크게 들릴 뿐만 아니라 기관총소리도 들리기 시작하였고, 저의 집에는 기관총 알이 하나 대문 옆 기둥에 박히었고 다른 피해는 없었습니다.
5. 6월 28일 이른 아침이 되었는데 하도 조용하여 길에 나가보니 이미 장총과 따발총을 민 인민군이 행군을 하며 지나가고 있고, 붉은 완장을 찬 빨갱이들이 나와 구경하고 있는 저희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설동 로타리에서는 국군 헌병이 정장을 한 채 총탄을 맞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한국전쟁 중 제가 본 첫 번째 시신이었습니다. 붉은기를 휘날리며 지나가던 트럭에서 내린 빨갱이들이 보고는 “개새끼”라고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6. 며칠 후 학생들은 학교로 나오라는 방송이 있어 학교에 등교하였습니다. 선생님들도 여러 명 나오셨는데 모두가 적색분자들이였습니다. 강당에 집합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 저사람 강단에 올라가 열변을 토하는데, 학생들 모두 의용군에 자진 입대하자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원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고등학교 학생들 거의가 즉석에서 의용군에 자원 하도록 하여 징집하여 가는 것입니다. 저보다 3년 위인 저의 둘째 형(김동수)은 같은 학년이고 같은 동내에 사는 친한 친구인 최광수 선배님(박정희 대통령 당시 외무부장관과 비서실장을 지냄)도 거기에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끌려가던 중 어느 골목길로 도망하여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집에 돌아 와서는 숨어 사는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7. 저는 중학교 1학년이어서 의용군으로 잡혀갈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며칠 후 학교에 다시 나갔습니다. 학교에는 인민군이 총검술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는 인민군이 “만세”, “만세” 라고 천천히 왜치면서 총검술을 훈련하고 있었는데 볼만하였습니다. 휴식시간에 나무 그늘 밑에서 인민군장교가 손에 찬 나침판을 보여 주면서 자랑스럽게 설명을 하여 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복장은 진흙색으로 땀이 범벅이 된듯한 복장이었습니다. 화동언덕 교사는 인민군의 임시 훈련소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8. 저는 또 동네의 인민위원회에서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하여 명동 시공관에 인솔되어 간적이 있었습니다. 시공관에서 인민군 환영의 행사가 있었는데 저의 옆에는 함경도에서 왔다는 인민군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인민군을 환영하는 연설, 그리고 인민군을 찬양하는 노래 순서 등이 있은 후 소련의 스탈린 그라드에서의 빨치산 영화를 상영하여 잘 구경하고 왔습니다.
9. 저에게는 당시 여의전(여자 의과대학)을 다니던 누님이 있었습니다. 여자인지라 집에서 걱정을 별로 하지 안 하였는데,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의대생임으로 의용군으로 징집이 된 것입니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아무리 알려하여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저는 저의 누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하였고, 소식만 나중에 들었습니다.
10. 저의 집은 아버지가 6.25 전쟁 전 해에 돌아가셨으나 조금 넉넉한 편이어서 쌀을 가마니로 사놓고 살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큰 곤란이 없이 지냈습니다.
쌀을 작은 종이 주머니에 넣어 책장, 책 뒤에 여기 저기 감추어 넣고 지냈습니다. 공산권 치하에 있던 3개월 동안 저는 가족을 조금이라도 도와야 겠다는 마음으로 길거리에 좌판을 들고 나가, 처음에는 좀 부끄러웠지만 담배 등 이것, 저것을 파는 좌판 장사를 하여 보았습니다.
11.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후에는 모두가 희망에 부풀게 되었습니다. 포성이 연일 가까워 지고 있었으며, 인민군이 쌀을 구루마에 싫고 도주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고, 미국 공군의 전투기가 저공으로 기습하는 장면도 목격하였습니다.
프러펠러가 없는 젯트기를 저도 처음 보았는데 그 속도는 너무 너무 빨랐습니다. 또 신설동 골목길에는 부상당한 인민군 수십 명이 들것에 실려와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9월28일 서울이 회복되었는데 미 해병대가 탱크와 함께 3개월 전 인민군이 진주하여 들어왔던 신설동 대로를 반대 방향으로 진군하여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태극기를 들고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12. 그러나 1950년 11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이듬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서울 시민은 1.4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저희 가족은 구루마를 끌고 서빙고 한강을 배로 건너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며칠을 만주거리(지금의 강남)라는 곳에서 쉰 후에, 구루마를 끌고 온 가족이 피란을 가는데, 용인쯤 되는 곳에서 피란민 행렬이 멈추더니, 국군이 탄 트럭이 수 없이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국군이 우리 보다 먼저 후퇴를 하였고, 우리는 이제 중공군과 국군사이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서둘러 다시 남진을 시작하였습니다. 밥은 먹어야 하겠기에 어느 들판에서 제가 장작을 놓고 휘발유로 불을 지피는데 휘발유가 옷에 엄청나게 묻어 있어 저의 몸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을 판인데 같이 나려가던 저의 삼촌이 눈 위에 나를 던지고 자기 몸으로 나를 감싸 안아 화상을 면하였습니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3. 안성을 지나 충청북도로 향하는데 멀리 아주 높은 산이 보였고 거기에 길이 보이는데 피란민 행렬이 그 길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거기가 옥정리 고개라고 하는데 그 고개를 넘어가야 충청도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은 열심히 구루마를 끌고, 밀고 하면서 이 고개를 넘어 가는데 거기서 국군 장병을 만났습니다. 국군이 여기 저기 참호를 파고 중공군과의 접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3년 위인 저의 둘째 형이 참호를 파는 작업에 징집이 되었습니다. 혼잡스러운 피란민 행렬에서 저의 작은 형이 사라지니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심히 걱정이 되었는데 약 한 시간 후에 작은 형이 헐레 벌떡 기적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무사히 옥정리 고개를 넘고 충북 진천에 도착하였습니다. 충북에 도착하니 날씨도 좋고 무엇보다도 평화로웠습니다.
14. 우리 가족은 진천을 지나 산천이 아주 아름다운 마을 초평에서 몇 일을 쉬고 증평에 도달하여 어느 농가에 방 하나를 얻어 정착하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농가의 농사일도 도왔지만, 1주일에 한번 장이 스는데 저는 석유장사를 하였습니다.
장이 스는 날에는 전기가 없는 농촌 사람들이 병을 들고 와서 석유를 사 가는데 제법 장사가 잘 되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15. 충청북도 증평에서 피란생활을 하였는데, 서울이 1951년 3월 4일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서울이 회복되었지만 작전상 아무나 서울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저의 가족은 밤중에 뚝섬을 통하여 도강하여 서울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서울 저의 집에 오니 참으로 감개무량하였습니다. 집은 파괴되지 않았지만 집안의 물품, 책등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저의 누님이 그 동안 저의 집을 다녀간 것입니다.
빈 집에 찾아 와 목욕탕 흰 벽에 “찾아 왔다가 그냥 돌아간다”는 글을 남겨 놓고 갔습니다.
16. 서울에 오니 서울에 있는 학생들을 위하여 서부 훈육소(경기 여중)와 동부 훈육소(동대문쪽)라는 임시 종합중고등학교가 설립이 되어 있었고, 저는 임시로 종로구 계동에 있는 저의 삼촌댁에 머물렀기 때문에, 서부 훈육소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중학교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산으로 피란 갔던 경기중고등학교가 서울로 올라왔는데 화동교사는 미군이 주둔 사용하는 관계로 덕소국민학교를 빌려 개교를 하게 되어 저도 이곳으로 옮겨 중학교 생활을 마치고 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졸업식은 건너편에 있는 경기여자 중고등학교 강당에서 하였습니다.
17. 고등학교 때에는 광화문 세종로, 현재 세종 문화회관이 있는 자리에 임시로 지운 판잣집 가교사에서 학교생활을 하다가 1956년 졸업을 1개월 앞두고 미군이 철수하여 화동 언덕교사로 옮겼습니다. 따라서 저는 화동 언덕교사에서 1개월을 보내고 고등학교 졸업을 하였고, 서울 법대에 입학하였습니다.
18. 한국 전쟁은 거의 모든 가정에게 비극을 가져 왔습니다. 전쟁이 지나간 지역은 초토화 되었고 군인은 물론 민간인의 인명피해 또한 엄청났습니다.
저의 가정도 두 형님은 숨어 지냈기 때문에 의용군으로 끌려가지 않았으나 여의전을 다니던 누님이 의용군으로 끌려갔습니다. 저보다 2년 고등학교 선배 되시는 임필순 의학 박사의 형님들도 의용군으로 끌려갔습니다.
임필순 동문께서 형님의 소식을 듣고 2001년에 이북을 방문하여 만나보고 왔는데 참으로 우연히 저의 누님도 만나 저도 저의 누님의 소식을 알게 되어 편지를 할 수 있게 되었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누님은 청진의과 대학 소아 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에 결국 만나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곳 워싱턴에 있는 Korean War Memorial에 가면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의 나라 이름이 새겨져 있고,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의 숫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고귀한 생명이 희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대가 없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고, 이러한 엄청난 희생을 기반으로 성취된 것인데, 오늘날 한국의 돌아가는 양상을 보면, 이 자유의 가치를 모르고 헛소리 하는 국민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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