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거리 곳곳에 붙은 폐업 인사말
- senior6040
- 2020년 12월 19일
- 3분 분량
<조선일보>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입력 2020.12.19
“그동안 감사...행복했습니다” “쿠폰, 문 닫기 전 꼭 쓰세요” 폐업 인사는 애잔한 시민 문학...코로나 빙하기 확인하는 나날

서울 봉천동 폐업인사 /김시덕
서울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 자리한 편의점이 얼마 전 문을 닫았다. 과묵해 보이던 중년의 남성 사장님이 가게 문을 닫으면서 이런 폐업인사를 남기셨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건강하시고 꼭 부자되세요!”
현대 한국의 곳곳을 걷다보면, ‘작가’ 라고 이름을 내세우지 않은 일반 시민들이 훌륭하게 자신들의 심정을 글로 표현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신도시 개발로 고향을 떠나게 된 ‘제자리 실향민’들이 세운 망향비, 새로이 건물을 세우는 마음을 압축적으로 담은 머릿돌,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대한 뜨거운 찬반양론이 담긴 팜플렛 등, 한국의 도시에는 시민의 문학이 넘쳐난다. 이들 시민의 문학 가운데 가장 애잔하게 다가오는 것이 폐업인사다.
폐업하는 이유도 여러가지다. 북촌•서촌에 비하면 전혀 유명하지 않았지만 개량 기와집이 넘쳐나던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강북구 미아동으로 이사하신 이발소 사장님은 이런 글을 남겼다.
“지난 40여 년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우리이발관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동안 도와주시고 성원해주신데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혹시라도 이전장소 방향으로 지나실 때 들려주시면 차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항상 健剛하시고 가정에 행복과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이사하신 곳에서는 두 번 다시 재개발 걱정 없이 은퇴하실 때까지 오래오래 가위를 잡으시기를 빈다.
한편, 재건축을 둘러싼 분쟁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과천정부청사 앞의 모 상가 건물 1층에는, 재건축으로 인해 폐업하게 된 카페 사장님께서 단정한 글씨로 폐업인사를 남기신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렀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 했습니다. 좋은 모습으로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커피로 힘든 하루를 시작하시던 아침 손님들 힘내세요. 바쁜 점심시간 늦게 나오는 음료 기다려 주신 손님들 감사해요. 매일 오셔서 열심히 공부하시던 손님들 응원해요. 책 읽으러 오셨던 조용한 손님, 즐거운 모임 가지시던 여러 손님들 모두 모두 행복하세요. 그리고 저희 최애 손님이었던 반려동물 친구들도 좋아하는 산책 많이 하고 건강하게 지내요^^ 저희도 각자 새로운 자리에서 라떼킹 기운으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마무리 !! 그동안 열심히 모아두었던 ‘쿠폰' 1월 31일까지 꼭 사용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

과천 별양동 폐업 인사/ 김시덕
안양의 오래된 전통시장인 석수시장 외곽에서는, 아마도 따님께서 어머니의 폐업을 알리고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중에 동료 상인과 손님들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멋진 폐업인사를 보았다.
“35년간 운영해 온 저희 엄마의 ‘세일타운’이 드디어 10월 10일부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희 엄마께 많은 힘과 용기를 실어주신 동료상인 여러분들과 손님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아니었다면 오랜기간을 엄마가 이토록 잘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겁니다.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엄마가 고운 꽃길만 걸을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도 더 열심히 효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로 인해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안녕과 평안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이 석수시장의 사장님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폐업하시는 것 같았지만, 폐업인사 말미에 적혀 있듯이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상인분들이 많다. 특히 지난 몇 달 사이, 폐업한 카페를 너무나도 많이 본다.
인천 계양구 계산동의 모 카페 정문에는, 코로나로 인해 영업시간을 단축한다는 안내문과 더불어, “9/1(화)~9/11(금) 휴무합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장기간의 휴업을 안내하는 글이 붙어 있었다. 사장님이 죄송해하실 일이 아닌데, 왜 방역 당국이 아닌 카페 사장님이 시민들에게 죄송해해야 하는지. 지난 추석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상향조정되면서 카페들이 테이크아웃 영업만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이렇게 아예 추석 기간 중 휴업한 카페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렇게 휴업에 들어갔다가 재개업하지 못하고 폐업에 이른 카페도 많이 본다.
얼마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갔을 때에는, 정부 방침에 따라 테이크아웃만 하는 커피 전문점 옆에서, 전통 찻집과 낮술을 파는 식당이 홀 영업으로 성업중이었다. 이렇게 원칙없이 일방적으로 카페의 홀 영업만 금지되는 바람에, 소규모 카페를 개업하고 또 그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코로나19를 명목삼아 신입사원 채용을 줄이는 회사도 늘어나는 등, 특히 청년들에게 가혹한 요즘이다. 사회가 청년들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는 형국이다. 일본에서는 버블 붕괴 이후의 취업 빙하기(就職氷河期)에 구직 기회를 놓친 청년들이 그 후 대량으로 사회의 흐름에서 낙오되어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상황이 사회 문제다. 거리 곳곳의 폐업인사, 휴업인사에서 코로나 빙하기의 징후가 확인되는 2020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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