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4700만원짜리 충동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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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0월 16일
- 2분 분량
<조선일보>최규민 기자 입력 2020.10.17
한 표 가격 4700만원이라는데 유권자는 충동구매 하듯 투표 대폭 오른 세금 고지서는 앞으로 치를 비용의 맛보기

최규민 경제부 차장
지난 총선 때 행정안전부는 한 표의 가치가 4700만원이나 되므로 신중하게 투표하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국회가 앞으로 4년간 심의할 예산을 유권자 수로 나눈 액수다. 이런 계산법의 정확성에는 이견이 있겠지만, 선거는 유권자의 선택과 그에 따른 기회비용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경제적인 성격을 띤다.

'행안부 한 표 의 가치'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에서 국민 한 표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요? 여러분이 행사하는 ‘한 표의 가치’는 4700만원 입니다./행안부
하지만 어떤 유권자도 4700만원짜리 자동차를 구매할 때만큼 신중하고 꼼꼼하게 후보자를 고르지는 않는다. 4만7000원짜리 신발을 살 때만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지난해 한 조사에서는 자기 지역구 국회의원 이름을 안다는 사람이 49%였다. 구청장이나 시의원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보다도 훨씬 적다. 요즘 인터넷에는 왕창 오른 세금 고지서를 받고 나서야 “민주당 찍은 걸 후회한다”고 토로하는 글이 줄줄이 올라온다.
‘합리적 소비자들이 선거 때는 왜 충동구매 하듯 투표하는가’는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을 괴롭힌 문제였다. 독일 유권자들은 히틀러의 나치당에 몰표를 던졌고,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를 망하게 한 건 국민이 열광적으로 지지한 정치인이었다.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설명 중 하나는 ‘정보 비대칭성’ 이론이다. 정치인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고, 정책이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유권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얘기다. ‘합리적 무시’ 이론이란 것도 있다. 나 하나 투표해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면,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후보자의 공약과 인물 됨됨이를 파악하느라 헛수고하지 않는 게 유권자로서 합리적 선택이라는 설명이다.
한국 특유의 상황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실, 한국 유권자들은 정치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경험해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서구에서는 보수와 진보 정당이 작은 정부 대(對) 큰 정부 또는 감세 대 증세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그 결과가 곧장 국민 삶을 좌우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대 정부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비교적 작은 정부를 지향해왔고, 특히 중산층과 서민 증세에 극도로 신중했다. 그래서 대부분 유권자는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세금이 크게 오르거나 내리는 경험을 한 적이 없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모든 삶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첫 정부이고, 대폭 오른 세금과 건강보험료 고지서는 그런 정부를 택한 당연한 결과다.
사람들이 표의 가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많은 유권자에게 실제로 투표가 공짜라는 점이다. 선거권은 국민이 병역이나 납세 같은 의무를 이행하는 대가로 얻는 권리지만, 우리나라 근로자 40%는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영국은 그 비율이 3%다. 세금을 내더라도 4년간 4700만원, 1년에 약 1200만원씩 세금을 내는 사람은 아주 적다. 일부 고소득자와 대기업이 세 부담의 거의 대부분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리와 의무가 동떨어질수록 공화국(共和國)의 토대는 흔들리기 마련이지만, 현 정부는 면세자들은 내버려둔 채 부자들에게서 뜯어낼 게 아직 많이 남았다고 큰소리친다.
그러는 사이 한 표의 값은 급격히 치솟고 있다. 행안부 식으로 계산해 4년 전 20대 총선의 한 표는 약 3700만원이었다. 거대 여당을 탄생시킨 21대 총선 한 표의 가격은 6개월 전 행안부 계산보다도 훨씬 비싸졌다. 2021~2024년 4년간 정부 지출 예상액은 2401조원. 유권자 4399만명으로 나누면 1인당 5458만원씩 앞으로 4년간 지불해야 한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무형 비용에 대한 청구서도 계속 날아들 것이다. 표현의 자유, 법 앞의 평등, 계층 이동의 기회 같은 것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충동구매의 대가가 이렇게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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