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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모두가 중산층이 될 필요는 없다?

  • 작성자 사진: senior6040
    senior6040
  • 2020년 12월 21일
  • 2분 분량

<조선알보>어수웅 문화부장 입력 2020.12.21


모두 강남 살 필요는 없다더니 이젠 아파트 포기하고 임대주택? 이창래 디스토피아 소설처럼 ‘중산층의 꿈’도 막는 건가


유년 시절의 추억이 있다. 새 아파트로 이사 간 친구의 초대. 복도식 아파트였는데, 문패가 있었다. 금박으로 테까지 두른 친구 부친의 함자(銜字).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흔적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때는 단독주택이 아니라 아파트에도 문패 붙인 집이 있었다. 마침내 집 한 채를 장만했다는 가장의 자부, 나도 중산층에 진입했다는 뿌듯함.


‘아파트 게임’을 쓴 동양대 박해천 교수는 이런 인용을 한 적이 있다. 무려 3000건 넘는 동시다발적 노사 분규로 기억되는 1987년 여름의 소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정주영 회장은 비서에게 울산 현대중공업의 무주택자 비율이 얼마냐고 물었다. 조사 결과는 전체 1만6000명 중 8000명. 보고를 들은 ‘왕 회장’은 낡은 기존 연립주택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원용 고층 아파트를 짓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고 한다. “이젠 근로자들이 집값 떨어질까 봐 데모 안 할 거야.” 결과는? 1995년 이후 19년 연속 무파업. ‘울산의 기적’이었다.


전세난이 매매시장을 자극하고 투기수요까지 가세해 전국 주간 아파트값 상승률이 2주 연속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셋값이 크게 오르며 매맷값과 격차를 줄이자 갭투자가 다시 꿈틀거리며 강남 아파트 매매도 살아나고 있다./연합뉴스



중산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통념이 있다. 최소 집 한 채를 갖는다는 것. 내가 그래도 집 한 채는 가진 사람이라는 것. 앞에서 언급한 울산의 아버지들은 이제 더 이상 ‘공고 출신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80년대 피 끓는 청년의 기억을 뒤로한 채, 자식 교육과 퇴직 이후를 근심하는 2000년대의 ‘중산층 아버지’가 된 것이다.


한국인에게 아파트가 단순한 집 한 채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 세대의 생애 주기를 떠올려보자. 신도시 개발로 아파트 건설의 팡파르가 울리면 신혼부부는 청약을 하고 내 집 한 채를 마련한다.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르고, 중장년에 이른 부모는 고민을 시작한다. 안 먹고 안 입어 마련한 집 한 채는 내 평생의 프라이드였지만, 정작 유복하게 자란 자식들은 평생 월급을 모아도 서울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없는 현실. 내가 남긴 집 한 채에 의존해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할 내리막 세상, 과장이 아니라 증여와 노후 보장은 ‘밀당'이나 거래 대상이 된다. 박 교수는 이를 생애 주기를 관통하는 K복지 시스템이라고 비유했다. 그런데 이 정권에 이르러 이 시스템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13평 4인 가족’의 대통령도, ‘호텔 전세’ 여당 대표도, ‘빵투와네트’ 국토부 장관도 모두 시작은 선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이 꼬투리 잡는다고 억울해하는 이들이 잘 모르는 게 있다. 국민의 분노는 단순히 표현 때문이 아니라는 것. 사실은 실언 혹은 망언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현 집권 엘리트의 공통된 내로남불에 대한 화(火)다. 자신들은 담 너머에 성을 쌓고 살면서, 국민에게는 임대주택이 좋은 거라고 세뇌하지 않느냐는 것. 강남에 살면서 “모두가 강남에서 살 필요는 없다”고 말했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신축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 환상 버리라”고 말했던 여당 미래주거추진단장, 딸은 의전원 보내면서 “붕어·개구리·가재로도 행복한 세상”을 외쳤던 전 법무부 장관처럼.


새로 맡게 된 보직 때문만은 아니지만, 미국 스탠퍼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는 작가 이창래의 장편소설 ‘만조의 바다에서’ 생각이 났다. LA타임스가 “오늘날 이창래보다 더 뛰어난 소설가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서평을 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이 우울한 가상의 미래에서 공공 임대주택에 살고 있는 평범한 2등 시민들은 절대로 높은 담을 넘을 수 없다. 담 너머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는 집권 엘리트는 자신들이 선하다고 확신하며 울타리 너머 세계를 이렇게 지배한다. “모두가 중산층이 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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