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청와대가 매설한 ‘가덕도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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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1월 20일
- 3분 분량
<조선일보>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20.11.2
공항 유치를 자신의 업적으로 자랑한 정치인들은 그 뒤 막대한 만성 적자에 대해 책임진 적 없었다

지난 9월 24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가덕도신공항유치국민행동본부 소속 부·울·경 시민들이 정부에 가덕신공항 건설을 촉구하며 삭발식을 진행하고 있다./연합뉴스
김해 신공항이 백지화됐을때,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흥분한 대구시장은 하수(下手)다. 청와대가 매설한 ‘가덕도 함정’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이다.
현 정권 사람들은 선거에 이기기만 하면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프로다. ‘성추행’ 오거돈 전 시장 때문에 치르는 보궐선거에 가덕도 신공항 카드를 안 꺼내면 오히려 이상했다. 친여 성향 신문 매체도 이를 ‘정치적 노림수’라고 썼다. 부산시장 보선만 아니라 후년 대선에서도 ‘가덕도 신공항’ 카드는 요술을 부릴 것이다. 돌아선 부산 표(票)를 다시 끌어오고, 영남을 PK와 TK로 갈라칠 수 있다.
현 정권이 짜놓은 전략대로 PKㆍTK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쪽 지역 신문들은 일제히 1면부터 서로 물어뜯고 있다. 몇 년 전에 보여준 충돌 상황이 재현될 조짐이다. 보수 야당에서 한솥밥 먹던 PK와 TK 출신은 반목할 것이다. 현 정권이 이런 장면보다 더 바라는 게 있겠나.
4년 전 영남권 광역단체장끼리 맺은 ‘신사협정’(김해 신공항)을 PK가 깬 모양새가 된 것은 사실이다. TK로서는 허탈할 것이다. 하지만 현 정권의 덫에 함께 걸려드는 일은 피해야 한다. 최악의 결과가 기다리는데도 대구시장이나 TK 의원들은 가덕도 신공항 반대 집회에 인파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지역 언론도 ‘TK의 단합된 힘을 보여주라’고 북을 두들기고 있다. 그러나 머리띠 매고 몰려나온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현 정권이 파놓은 ‘갈라치기 덫’에 더 깊이 빠져들 뿐이다.
지금 TK는 가덕도 신공항에서 한발 빼는 게 현명하다. 현 정권에 놀아나는 진흙탕 싸움을 멈출 수 있는 길이다. 안 그러면 대형 국책 사업을 갖고 선거 때 이런 장난을 치는 정권의 도덕성 문제는 PKㆍTK 대결로 덮이고 만다. 국책 사업 선정 절차와 규정을 무시하고 예비 타당성 조사도 생략하고 막 밀어붙이는 집권 여당의 독재적 행태에도 맞설 수 없게 된다.
노무현ㆍ이명박 후보 모두 동남권 신공항을 공약했지만 경제성 부족으로 무산됐다. 그럼에도 다음 대선 후보들도 똑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공항 입지를 둘러싸고 PKㆍTK의 격돌이 극에 달하자, 박근혜 정부는 세계 최고 권위의 ‘파리공항공단 엔지니어링’에 용역을 줬고 영남권 단체장들은 결과에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압도적 점수로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정 났다. 가덕도는 꼴찌였다.
김해공항은 그나마 부·울·경의 중간 지점쯤 된다. 부산 시내에서 30분이 채 안 걸린다. 가덕도보다 접근성 좋고 거리도 짧다. 경제성ㆍ안전성 등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태풍과 해일이 닥칠 수 있는 가덕도는 항공기 이착륙에 취약하다. 깊은 바다를 매립하기 때문에 지반 침하 문제도 생긴다. 하지만 부산에는 과학적 판정 대신 ‘김해 신공항은 안전하지 않다’는 미신(迷信)이 퍼져 있다.
공기(工期) 측면에서도 김해 공항에 활주로를 하나 더 놓고 시설을 확충하는 게 빠르다. 깊은 바다를 매립하고 공항 철도와 도로망을 모두 새로 깔아야 하는 가덕도 신공항은 드는 돈이 김해보다 두 배 넘는 10조2000억원으로 추산됐다. 토목 관계자들은 실제로는 이보다도 훨씬 더 들 것으로 본다.
왜 부산에서는 이런 악조건의 가덕도에 매달릴까. 폭은 좁고 해안 산지를 따라 띠 모양으로 이뤄져 공항 부지가 없기 때문이다. 가덕도는 부산의 서쪽 끝에 있다. 부산 동쪽에서는 접근성이 떨어진다. 울산시에서는 완전히 남의 공항이 되는 것이다. 울산시장은 같은 여권 단체장이라는 이유로 가덕도의 들러리를 서주고 있다.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부산 사람들은 가덕도에 세워야만 ‘PK 숙원 사업’이 이뤄지는 걸로 믿고 있다. 가덕도는 인접한 부산 신항(新港)과 연계되고 24시간 운영 가능한 ‘아시아 허브 공항’이 될 것이라고 한다. 세계 150도시와 연결되는 ‘인천공항’처럼 말이다. 하지만 항공업계나 관련 전문가들은 이게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장밋빛 환상인지를 설명해줄 것이다. 천문학적 돈을 들여 공항을 지어놓아도 항공사는 채산이 안 맞으면 취항하지 않는다. 항공 노선은 여객과 화물 수요가 있어야 들어오는 것이다.
노무현 시절 ’2025년에는 수요 증가로 김해공항이 포화 상태에 이를 것'이라는 동남권 신공항을 위한 연구 보고서가 나왔다. 과연 지금 그런가. 국내 공항들은 부풀린 항공 수요를 내세워 선거 공약으로 건설됐다. 그 공항 대부분이 개점 휴업 상태다. 엄청난 국민 세금을 퍼붓고는 고추나 말리고 있다. 공항 유치를 자신의 업적으로 자랑한 정치인 중에서 그 뒤 막대한 만성 적자에 책임진 이는 없었다.
가덕도 신공항만 생기면 부산이 확 바뀔 것처럼 말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면 일단 사기꾼 비슷하게 보면 된다. 공항이 무슨 마법(魔法)을 부리겠나. TK는 발걸음을 멈추고, PK는 표 매수 행위에 현혹되지 않기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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