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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우리 미래를 보는 듯한 미국 대선

  • 작성자 사진: senior6040
    senior6040
  • 2020년 11월 11일
  • 3분 분량

<조선일보>정진홍 컬처엔지니어 입력 2020.11.11


# ‘바이든이 좋아서가 아니라 트럼프가 싫어서 열린’ 바이든 시대는 아직 혼돈 상태 그 자체다. 아울러 ‘팬덤(fandom)’ 정치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파괴하고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위험이라는 점을 우리는 트럼프를 통해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미국을 벼랑 끝까지 내몬 것이 트럼프의 팬덤 정치였다면 한국에서는 친문 정치가 그 짝이다. 굳이 차이라면 트럼프가 쉼 없이 떠벌리는 스타일이라면 문재인 대통령은 ‘꿍’한 채 말이 없다는 정도뿐이다.


# 그런데 미국의 압도적 다수 언론과 국민이 트럼프에 대해 진저리를 치면서도 정작 그에 대항할 만한 국가적 인물을 내세우지 못한 채 워싱턴 정가의 뻔하디 뻔한 인물인 조 바이든을 대항마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차기 대선에 이렇다 하게 내세울 사람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국민 다수가 미래 한국을 이끌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날 것 같지도 않다. 그나마 여론조사상 선두 그룹을 이루고 있는 여권의 이낙연 민주당 대표, 이재명 경기지사는 친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시쳇말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하며 안간힘을 써야 하는 팬덤 정치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 이런 가운데 친문의 히든 카드라고 여겨지던 김경수 경남지사가 2심에서도 유죄를 받자 친문의 팬덤은 정말이지 갈 곳 몰라 한다. 마음 줄 곳을 잃은 채 표류하는 친문 팬덤이 한국의 정치 지형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일러스트=박상훈



# 그런가 하면 야당은 문재인 정권의 난정(亂政)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등에 업기는커녕 제대로 된 후보군조차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반쪽짜리 여론조사에서라도 세간의 지지를 받는 선두 그룹 세 사람, 즉 윤석열, 안철수, 홍준표는 모두 현 야권의 구심점이라 할 ‘국민의힘’ 바깥에 있다. 그래도 100명이 넘는 국회의원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의힘’이 야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세간의 당위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이 뜨뜻미지근하고 근성 없는, 사실상 현실에 안주하는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과연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내년 서울·부산시장 재·보선과 후년 대선에서 친문의 팬덤 정치를 꺾고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은 지금으로 봐선 1%도 안 돼 보인다. 친문의 팬덤이 갈 곳 몰라 하는 것 이상으로 흐리멍텅한 야권의 대책 없는 모습에 국가의 정상화를 바라는 국민은 소리 없이 복장만 터진다.


# 프랑스인 알렉시 드 토크빌이 얼추 190년 전인 1831년 10개월 남짓 미국을 둘러보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출간한 것이 1835년(1권)과 1840년(2권)이다. 그는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대륙보다 앞선 제도와 문화로 판단했지만 그 바탕에 깔린 ‘모든 조건의 평등화’라는 요소와 ‘다수자에 의한 전제(專制)’의 폐해를 일찌감치 지적한 바 있다. 놀랍게도 토크빌이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고 지적한 점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기회의 공정이란 기치 아래 추구되는 기계적인 평등화와 다수의 정치적 전횡으로 현실화된 다수자의 전제정치가 그러하다. 그런데 진짜 주목할 점은 토크빌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진단이 있은 후 20년 만에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년)이란 내전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 사실 우리도 내전을 치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야말로 정치적, 문화적, 심리적인 내전이다. 그래서일까? 사회심리학 용어인 ‘선택적 인지(selective perception)’가 우리 정치 현실에서만큼 적나라하게 적용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각자의 진영 논리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며,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선택적 포착, 선택적 청취, 선택적 발언, 선택적 믿음이 우리 정치 레토릭의 표준처럼 되어버렸다. 그것이 정치를 넘어 전 사회적으로 파급되며 우리는 사실상 전 국민이 인식상의 내전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 남북전쟁이 끝난 후 7년이 지난 1872년, 전쟁으로 허물어진 미국의 정신을 새롭게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메타피지컬 클럽’이란 이름의 토론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연방대법관 출신의 올리버 웬들 홈스, 현대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린 윌리엄 제임스, 논리학자이자 기호학의 창시자 찰스 샌더스 퍼스, 그리고 철학자이자 교육학자로 이름을 남길 다소 젊은 존 듀이 등이 그 모임의 주축이었다. 고작 9개월 남짓 지속된 모임이었지만 이들은 우리가 왜 내전을 피할 수 없었나를 두고 격론을 벌인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신념과 이념이 극단화되면 전쟁이 터진다.” 그렇다. 각자의 신념과 이념은 고귀한 것일지 모르나 그것이 상대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할 만큼 극단화되면 결국 전쟁으로 치닫는다는 결론이었다.


# 그래서 이들은 사고의 상대성, 피차의 오류 가능성 등을 인정하려는 노력 아래 신념이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프래그머티즘’이란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미국의 실용주의다. 미국 실용주의의 근간은 한마디로 상대를 인정하고 극단을 배제하는 것이다. 동시에 나의 실존과 개성을 인정하려면 너의 실존과 개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상호주의가 바탕에 깔린 것이다. 이런 실용주의가 미국을 부강하게 만들고 세계의 지도국이 되게 만든 바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은 더 이상 프래그머티즘의 나라가 아니다. 팬덤과 반(反)팬덤이 충돌하는, 그래서 또다시 내전 상황으로 치달을지 모를 만큼 불안정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미국 대선 그 이후를 더 주목해야 할 이유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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