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 senior6040
- 2020년 11월 4일
- 2분 분량
[LA중앙일보]발행 2020/11/04 최근자 / 수필가

괜찮아요. 손자의 말을 되새기며 스스로 최면을 건다. 다 괜찮아질 것이다. 손자의 뒷모습을 보며 그날이 떠올랐다. 아들이 아들을 낳았다. 한동네 가까이 사는 것도 아니고 남북으로 한 시간 가량 떨어져 사는 지역적 조건도 있지만 난 애초부터 손자를 봐줄 마음은 없었다. 아이 키우는 일이라면 내 두 아이로 족했다. 그 힘든 일을 왜 또 하랴 싶었다. 네 자식은 네가 알아서 키워라. 용감하게 선포했던 터라 아들도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1년 가량 임신, 출산 휴가를 받았던 며느리가 직장에 돌아가야 했다. 다시 일하기 전에 재충전이 필요하다며 여행을 원했다. 이틀만 아기를 봐 달라는 거였다. 흔쾌히 받아 주었다. 백일이 막 지난 손자가 처음으로 할머니와 외박을 하게 되었다. 거의 30년이 지나 품은 작은 생명체였다. 보드라운 아기의 피부가 와 닿는 감촉. 말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은 경이로웠다. 이렇게 작고 예쁜 아기를 어떻게 남의 손에 맡긴단 말인가. 아들 내외가 여행에서 돌아와 아기를 데리러 왔을 때, 용감하게 선포했던 말을 스스로 걷었다. 라이언은 내가 봐줄게. 아기는 아침부터 칭얼대며 보챘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 4개월 된 아기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대답을 들을 형편도 아니었다. 혹시 병이 난 건 아닌가. 애 봐준 공은 없다더니 슬슬 겁이 났다. 보채는 아기를 달래려고 긴 시간 안고 있자니 팔이 아팠다. 침대 위에 아기를 뉘었다. 이번엔 자지러지게 운다. 이래도 저렇게 해 봐도 속수무책이다.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한 심정으로 창밖을 보니 자카란다 꽃잎이 보라색 눈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참 아름답다. 아기에게 시달리던 마음에 평정이 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놀란 가슴으로 침대 위에 아기를 보니 고개를 비스듬히 창 쪽으로 돌려 휘날리는 자카란다 꽃잎을 보고 있지 않은가. 보라색 꽃잎은 작은 아기에게도 위안이 된 것일까. 자신의 의사를 울음으로밖에 전달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온전히 다른 세계에서 허둥거리며 우왕좌왕하는 할머니가 안쓰러웠는지도 모른다. 유일한 소음이던 아기가 울음을 그치니 태고의 정적이 내려 앉았다. 화사한 행복이라는 자카란다의 꽃말이 떠올랐다. 풋풋한 향기를 뿜어내며 보라색 나비가 봄바람에 멋진 춤사위를 보이는 듯해 눈이 황홀했다. 괜찮아, 곧 괜찮아질 거야. 내 마음이 통했는지 아니면 포기를 한 것인지 얼마 후 아기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후 보라색 자카란다 꽃잎이 길 위에 쌓이면 으레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그 아이가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다. 원하던 대학에 진학해 시카고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들렀다. 아직 팬데믹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했다. “힘들어서 어쩌니?” 보채며 울던 아기를 어찌할 수 없었던 참담한 심정으로 겨우 말했다. 휘날리는 보라색 꽃잎을 바라보던 그 눈이 마스크 위에서 말한다. “괜찮아요.” 내년 자카란다 꽃잎이 날리기 전에 지금의 이 힘든 시간도 떠나갔으면 좋겠다. 자잘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가 바라는 화사한 행복이다. 내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던 손자의 따스한 손길이 아직도 느껴진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page=1&branch=HOME&source=&category=opinion&art_id=8805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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