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배달 소년, 세계서 가장 섹시한 남자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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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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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김성현 기자 입력 2020.11.02

1982년 '007 시리즈'인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촬영지인 프랑스 니스에서 포즈를 취한 숀 코너리. 오른쪽은 2000년 영국 훈장을 받을 당시의 모습. AFP·로이터 연합뉴스
‘제임스 본드’가 지상에서 마지막 미션을 끝냈다. 최장수 영화 시리즈로 꼽히는 첩보물 ’007′의 원조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영국 배우 숀 코너리(90)가 31일 바하마 나소에서 숨을 거뒀다고 BBC 등 영국 언론들이 전했다. 나소는 007 시리즈의 촬영 무대로 유명하다. 말년에 코너리는 가족들과 함께 나소에 거주했다. 007 시리즈는 1962년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Dr. No)'부터 지금까지 총 27편이 제작됐다. 이 가운데 코너리는 첫 작품을 포함해 7편에 출연했다.
귀족적인 이미지와 달리, 코너리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장 근로자와 트럭 운전사로 일했고, 어머니는 환경 미화원이었다. 코너리도 아홉 살 때부터 아침마다 등교할 때까지 4시간 동안 마차로 우유를 배달했다. 13세에 학업을 중단했고 16세에 해군에 입대했다. 십이지장 궤양으로 3년 만에 제대한 뒤에도 트럭 운전사, 수영장 안전 요원, 미술학교 모델로 일했다. 장례식에 쓰이는 관(棺)을 닦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188㎝ 장신인 코너리는 축구에도 빼어난 재능을 보여서 스코틀랜드의 유소년 축구 팀에서 선수로 뛰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에게 주당 25파운드에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연기에 투신하기 위해 거절했다.

1982년 007 시리즈의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을 촬영할 당시의 숀 코너리. 그는 1962년 이 시리즈의 첫 작품부터 7편에 출연해 ‘원조 제임스 본드’로 불렸다. /AFP 연합뉴스
연기 경력의 출발은 평범했다. 1953년 뮤지컬 ‘남태평양’의 영국 순회 공연 당시 합창단으로 데뷔했다. 연극과 TV 드라마의 단역 배우로 경력을 쌓았고, 부족한 생활비는 아기를 돌봐주는 베이비시터로 충당했다. 극단 동료 배우들에게 셰익스피어와 버나드 쇼, 입센의 희곡이나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빌려 읽으며 연기 연습을 했다. 1992년 인터뷰에서 그는 “밤마다 연극도 보러 다녔지만, 내 삶을 변화시킨 건 독서였다. 나야말로 살아 있는 증거”라고 말했다.
반세기 넘는 그의 연기 경력에서 분수령이 된 작품은 역시 ’007 시리즈'였다. 하지만 그는 섹시한 첩보원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고 1980~1990년대에도 꾸준하게 새로운 배역에 도전했다. 1986년 움베르토 에코의 원작 소설로 유명한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원의 연쇄 살인을 추적하는 윌리엄 수도사 역으로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처음 받았다. 이듬해 ‘언터처블’에서는 악당 알 카포네를 추적하는 베테랑 형사 역으로 미국 아카데미·골든글러브에서 모두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지지자인 숀 코너리는 2000년 영국 기사 작위를 받을 때에도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을 입고 나왔다. /로이터 연합뉴스
그 뒤에도 인디아나 존스 3편(1989)에서 주인공 존스(해리슨 포드)의 아버지 역할, ‘더 록’(1996)에서 악명 높은 알카트라즈에서 탈옥에 성공한 죄수 역을 맡았다. 나이 들어서도 스크린에서 카리스마와 리더십, 반골 기질과 이지적 매력을 뽐내는 것도 드문 경우였다. 1989년 미국 잡지 피플에서 ‘가장 섹시한 남성’에 선정됐을 때 59세였다. 2006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의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뒤 은퇴를 발표했다.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지지자로 2014년 부결된 주민 투표 당시에도 분리 독립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의 팔에는 두 개의 문신이 있는데 하나는 ‘엄마 아빠(Mum and Dad)’, 또 하나는 ‘스코틀랜드여 영원히(Scotland Forever)’라고 한다.
코너리 이후 007의 계보는 로저 무어(7편), 티머시 달턴(2편), 피어스 브로스넌(4편), 대니얼 크레이그(5편)로 이어졌다. 2017년 숨을 거둔 무어의 유족들은 코너리의 별세 소식에 트위터를 통해서 “그와 로저는 수십 년간 친구였고, 로저는 언제나 숀이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고 밝혔다. 현재 007 역인 크레이그는 “그가 스크린에서 보여준 재치와 매력은 메가와트 수준으로 그는 현대적 블록버스터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다”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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