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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아홉에 인간문화재… 네 시간 완창도 끄떡없죠”

  • 작성자 사진: senior6040
    senior6040
  • 2020년 10월 23일
  • 2분 분량

<조선일보>김경은 기자 입력 2020.10.23


‘심청가’ 보유자 된 김영자 명창, 내일 국립극장서 ‘심청가’ 선보여


24일 오후 3시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강산제 심청가'를 완창하는 김영자 명창. /국립극장



서울 한국의집 민속극장. 예닐곱 살 때부터 동네 어른들 앞에서 소리를 해가며 수많은 무대를 섭렵한 백전노장도 텅 빈 객석 앞에선 꿀꺽 침을 삼켜야 했다. 판소리 ‘심청가’ 인간문화재를 심의하는 현장이지만, 무대엔 노래 부르는 창자(唱者)와 북 치는 고수(鼓手)만 있을 뿐. 서너 시간을 꼼짝 없이 완창해야 하는데, 심사위원들은 어디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고, 관객도 없는 게 관례라고 했다.


완창이 시작됐다. “너 낳자 나 죽으니 가없는 이 설움을 너로 하여 품게 하니, 죽는 어미 사는 자식 생사 간에 무슨 죄냐?” 심 봉사의 아내인 곽씨가 핏덩이 딸을 낳고 죽어가면서 남편에게 유언을 남기는 대목부터 심 봉사가 딸 청이를 잃곤 망사대(望思臺)를 찾아가 “아이고, 내 자식아아아!” 구슬피 탄식하는 대목까지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홀로 선 김영자(69) 명창은 네 시간 동안 부채를 쥐었다 폈다 하며 정교한 너름새와 공력이 깃든 창을 내보였다. 지난 9월 마침내 한평생 꾸어온 인간문화재(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하아!” 탄식하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는 24일 오후 3시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리는 ‘김영자의 심청가’는 그날의 감동을 되살리는 무대. 예순아홉에 인간문화재가 된 김 명창이 관객들 앞에서 ‘강산제 심청가’를 제대로 선보인다. ‘심청가’ 보유자가 된 이후 처음 펼치는 완창 공연이다. 남편 김일구 명창과 함께 전주한옥마을 온고을소리청에서 전화를 받은 그는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문화재가 되어도 김영자고 문화재가 안 되어도 김영자다!”


1985년 소리꾼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판소리부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198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전수교육조교가 됐다. 다수의 공연에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한 김 명창은 국내뿐 아니라 1999년 미국 카네기홀, 2003년 미 링컨센터 페스티벌과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등에서도 완창 무대를 선보이며 박수를 받았다.


고향은 대구. 광주 출신으로 1950년대 중앙동에서 금은방을 했던 부친은 눈만 뜨면 축음기를 틀었다. 종일 판소리에 취했다. 어깨너머로 들은 딸이 밥 먹을 때도 흥얼흥얼, 놀면서도 흥얼흥얼했다. 심각성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대구·경북 지역에서 ‘애기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 말리셨어요. ‘너 이거 허면 고생은 죽도록 하고, 빛은 못 본다. 절대로 허면 안 된다.’” 그때는 못 알아들었다. “예, 하고는 닿지도 않는 마이크를 향해 의자 위에서 소리를 했지요.” 결국 아버지는 당시 대구국악원에 와 있던 강산제 보성소리의 계승자 정권진 명창에게 딸을 데려갔다.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그는 김준섭 명창을 비롯해 김소희·박봉술·성우향 등 당대 명창들에게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배우며 자신만의 소리 세계를 만들었다.


막상 인간문화재가 되고 보니 “큰 산이 앞에 놓인 것처럼 걱정도 된다”고 했다. 1974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1999년 퇴직 전까지 1000여편 넘는 창극의 주역으로 활동한 그는 안정적인 중하성은 물론 시시상청까지 올려 질러내는 고음이 탁월하다. 그는 “벌써 세월이 20년이나 흘렀다”면서도 “그때의 김영자를 아는 분들이 이번 공연을 보시고 ‘김영자 아직 안 죽었네!’ 하는 말씀을 듣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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