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 정은경 청장은 과학을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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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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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입력 2020.10.16 안혜리 기자

안혜리 논설위원
국민을 설득할 과학적 근거는 부족하고 정부를 대변하는 정무적 판단은 넘쳐난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지금까지 코로나19에 대응해온 자세다. “K 방역을 성공으로 이끈”(문재인 대통령의 추천사) 공로로 지난달 미국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린 국민 영웅에게 이 무슨 막말이냐고 따져 묻는다면, 정 청장이 고비마다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한번 복기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늘어난 흰머리’ 같은 감성적 이미지를 지우고 나면 그가 지금까지 데이터에 기반한 과학적 판단을 내리기보다 정권 입맛에 맞는 정치적 행보를 이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부 오판에 한번도 반기 안 들어 데이터 기반한 과학적 방역 대신 고비마다 정권 입맛 맞춘 행보만
가장 최근의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 완화 결정이나 지난 8월 17일 임시 공휴일 논란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방역 당국이 스스로 정한 1단계 기준으론 2주간 일평균 국내 신규 환자가 50명 아래로 떨어져야 하지만 당시 실제 발생 환자는 60명에 육박했다. 만약 일각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코로나 치명률이 초기와 달리 뚝 떨어진 만큼 확진자 수 대신 중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기준으로 방역을 전환한 것이라면 관련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민들에게 이해를 구했어야 한다. 과도한 공포를 주입하는 대신 계절 독감처럼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정 청장은 여전히 기존의 확진자 수만 염두에 두고 “집단감염 경각심을 낮출 수 없는 상황으로 가을 산행 등 단체여행을 자제해달라”고 요구했다. 정부에 노(No) 하는 대신 또 한번 국민에게 방역 기준을 뛰어넘는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행태는 수시로 반복됐다. 지난 8월 정부는 외식·영화·여행을 망라한 대대적인 할인 소비 쿠폰을 뿌리고 임시 공휴일까지 만들어 사회적 거리두기 대신 대면 접촉을 장려했다. 이를 계기로 확진자가 치솟자 이전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했고, 결국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결혼식은 갑작스레 연기되고 추석에 가족을 만날 수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정부의 오판이 불러온 참사였다. 우리가 정 청장에게 기대하는 건 이런 오판을 줄이는 과학적 접근이다. 하지만 그는 실망스러운 두 가지 모습만 보여줬다. 침묵하거나 혹은 동조하거나. 방역과 거꾸로 가는 정부의 소비 쿠폰 정책에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정 청장은 “사전협의 없이 임시 공휴일이 지정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자마자 “별도 검토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동의한 것”이라며 정부를 옹호했다. “관련 정책을 결정할 당시 국내 확진자 숫자가 안정적이었다”는 이유다. 하지만 이때와 마찬가지로 하루 확진자 수가 안정적이었던 개천절 전날엔 집회를 위험요인으로 콕 집어 말하며 정부의 시위 원천봉쇄에 힘을 실어줬다. 한글날 연휴 때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큰 폭의 환자 증가세는 보이지 않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했다. 데이터는 온데간데없이 이렇게 정치적 판단만 난무했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 시행 중일 때 직원 수십 명이 다닥다닥 붙은 채 이뤄진 본인의 초대 질병관리청장 임명장 수여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국민적 호감도가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4월 총선 때부터 일찌감치 이런 조짐이 보였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은 앞다퉈 선거 공보물에 그의 사진을 실으며 ‘정은경 마케팅’에 나섰다. 민감한 시기에 방역을 책임진 인물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하면 적절치 않다고 자제를 요청할 만했다. 실제로 미국판 정은경이라고 불리는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 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광고에 그의 인터뷰 영상을 활용하자 즉각 비판 성명을 냈다. 민주당 바이든 후보의 노골적인 구애에도 선을 그었다. 정 청장은 달랐다. 불필요한 정치적 구애를 물리치는 엄정한 과학자의 모습을 보이지도, 과학적 근거를 무시한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들지도 않았다. 이러니 과학 아닌 정치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3밀(밀접·밀집·밀폐)이 코로나19에 가장 취약한 환경이라는 건 상식인데 하루 이용객 수가 무려 750만 명인 서울 지하철에선 마스크 의무화 이전부터 왜 단 한 명의 n차 감염자도 나오지 않았을까. 파주 스타벅스 2층 고객의 집단감염이 에어컨을 통한 에어로졸 전파가 원인이라면 다른 실내에선 왜 이런 집단감염이 보고되지 않았나. CCTV와 휴대전화 위치추적에 QR코드까지, 사실상 전 국민의 동선을 들여다보는 나라의 방역 당국 수장이라면 확진자 수만 읊으며 청와대와 보조를 맞추지 말고 데이터에 기반해 이런 궁금증에 답해주기 바란다. 안혜리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안혜리의 시선] 정은경 청장은 과학을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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