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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보아‧BTS 이전 미국 시장을 휩쓴 원조 한류 걸그룹

  • 작성자 사진: senior6040
    senior6040
  • 2020년 12월 2일
  • 5분 분량

<조선일보 탑클래스>입력 : 2020.12.02


김시스터즈 下 <김치깍두기>


미국 CBS에서 방송한 《에드 설리반 쇼(The Ed Sullivan Show)》라는 유명한 프로그램이 있다. 1948년부터 1971년까지 거의 사반세기 미국 안방극장의 황제로 군림한 쇼이다. 그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도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하고 싶어 오매불망 에드 설리반의 초대를 기다렸다.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처럼 대단한 가수도 《에드 설리반 쇼》에 나오면 출연자 대기실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다 나가서 노래하고 들어왔다. 모든 출연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3분이었다. 그러나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한 그룹을 에드 설리반이 유난히 좋아해서 그들에게 나중에는 7분까지 시간을 준 일이 있다. 《에드 설리반 쇼》 최다 22회 출연 기록을 세우기도 한 이들은 다름 아닌 한국의 김시스터즈이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는 꿈도 꿀 수 없던 시절,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이던 그 시절에 황금기를 구가하던 세계 최강 미국에 진출해 한국을 알린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풍요로움과 성공을 당연하게 즐기는 우리들이 새겨볼 역사이다. <김시스터즈上>편에 이어...



미국에서 성공하고 처음으로 귀국한 김시스터즈는 신곡 취입을 했다. 민자의 아버지이자 숙자, 애자의 외삼촌인 이봉룡이 작곡한 <김치깍두기>이다. 1970년대 노래라 그런지 가사가 좀 이상하지만 구수한 맛이 있다. ‘머나먼 미국 땅에 10년 넘어(게) 살면서 고국 생각 그리워.’ 여기까지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다음이 문제다. ‘아침저녁 식사 때면 런치에다 비후스텍 맛 좋다 자랑쳐도…’ 자랑을 치는 사람도 있나? 비후스텍은 비프 스테이크이다. 1970〜1980년대에 흔히 보던 경양식집 메뉴에는 늘 돈까스와 함께 비후까스가 들어 있었다. 돈까스는 돼지고기를 튀긴 것이고 비후까스는 소고기를 튀긴 것이다. 어떤 음식점은 ‘비훗가스’라고 적은 곳도 있었다. 소고기를 뜻하는 영어 단어 비프(Beef)의 당시 한글 표기가 ‘비후’였다. 참고로 뉴욕의 표기는 뉴우요오크였다.

이 노래의 가사는 부유한 사람들만 먹던 양식 그것도 비싼 소고기 스테이크를 늘 먹는다고 자랑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또 이상한 것이 있다. 아침저녁 식사 때 이야기를 하면서 런치를 먹는다고 하니 이것도 말이 안 된다. 아침은 영어로 브렉퍼스트이고 저녁은 디너이고 런치는 점심 식사라는 뜻이다. 아침저녁 메뉴로 런치와 비후스텍을 먹는다는 것이 대체 무슨 소리일까? 이런 건 그냥 웃자고 해보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런치가 한국말로 무슨 뜻이냐가 아니다. 서양 음식에 적응을 못 해 황달까지 걸리며 이를 악물고 성공한 그들의 이야기 나아가 한인 이민 사회의 고생담이 그대로 녹아 나온다. 비후스텍 먹는다 아무리 자랑쳐도 ‘우리나라 배추김치, 깍두기만 못하더라. 코리아의 천하 명물 김치깍두기. 자나 깨나 잊지 못할 김치깍두기.’


<김치깍두기>를 열창하는 김 시스터즈. ⓒKBS방송화면 캡처


미국 식료품점에 한국 라면이 그득하고 두부에 김치까지 파는 요즘 세상에 미국 유학을 간 사람들은 이 가사가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이야기이다. 195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나의 외삼촌은 김치가 그리워 토마토케첩에 핫소스를 섞어 거기에 날양배추를 찍어 먹었다고 한다. 나도 한국 가게나 음식점이 없는 작은 도시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서 그 고충을 안다.

난 원래 느끼한 음식을 즐긴다. 한국에서 피자나 파스타를 먹을 때면 으레 나오는 피클을 거의 먹는 일이 없다. 입안의 느끼한 기운을 씻어내기 싫은 까닭이다.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니 대학 때 기숙사 음식도 잘 먹고 김치 없이 한두 달도 수월하게 견뎠다. 한국에서는 어머니가 몸에 나쁘다고 절대 먹지 못하게 했던 살라미, 페퍼로니 등 소시지를 눈치 보지 않고 맘껏 먹을 수 있으니 오히려 좋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른 음식에 적응을 잘한다는 것뿐이지 한국 음식이 그립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외삼촌 댁에 가서 김치를 보는 순간 걸신들린 사람처럼 달려들어 김치만 먹었다. 오죽하면 외숙모가 내가 온다고 김치를 새로 담글 정도였다. 방학 때 서울로 올 때면 먹을 음식을 종이에 적어 왔다. 나는 다행히 느끼한 음식을 잘 먹어 오히려 점점 살이 쪄 걱정이었지만, 입이 짧은 사람들은 그냥 굶다가 바짝바짝 말라 들어갔다. 결국 애자처럼 쓰러지기도 했다. 음식이 맞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김치깍두기> 2절도 1절과 가사가 비슷한데 음식 이름만 바뀐다. 뚝배기 된장찌개, 고추장, 명태찌개 등 10년 동안 미국에 살면서 음식에 대해 맺힌 한을 몽땅 다 풀려는 듯 먹고 싶었던 음식을 가사에 죄다 집어넣은 것 같다. 듣다보면 지금 한국에 와 자가 격리하면서 하루 종일 먹는 것밖에 하는 일이 없는 나조차 군침이 돌고 배가 고파진다. 미국서 아시아계 가수로 드물게 싱글 레코드 발매


김시스터즈는 <김치깍두기>는 미국 텔레비전에 나와 부르기도 하고, 싱글로도 발매했다. 그 시절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가수로서 싱글 레코드를 발매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이란 노래도 리바이벌해 싱글로 발매했는데 꽤 인기를 끌었다. 귀국 공연을 할 때도 <찰리 브라운>을 자주 불렀다.

애자의 코미디언 못지않은 표정과 행동으로 무대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해 ‘Charlie Brown’을 부르는 실황 등을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해송이 작곡하고 이난영이 불렀던 노래 중에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1930년대 대중음악이 이런 수준이었나 싶게 세련된 재즈풍의 노래이다. 김시스터즈가 리바이벌해 부른 것도 유튜브에 있다. 이난영의 노래보다 현대적으로 편곡을 했다.

가사 중에 1절에 ‘커피를 마시며’를 김시스터즈는 ‘뮤직을 들으며’로 바꿔 부른다. 그들의 장기인 3중창 하모니가 일품이다. <다방의 푸른 꿈>은 이난영과 김시스터즈의 이야기를 다룬 2015년 작 기록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원조 걸그룹격인 '김시스터즈'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다방의 푸른 꿈> 포스터. ⓒ인디라인


이난영의 대표곡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의 영상도 많고, 김숙자가 이난영 탄생 100주년 기념공연에서 부르는 영상도 있다. 주현미가 대한민국 3대 기타리스트 중 하나라는 함춘호의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것도 좋다. 주현미가 요즘 잊혀가는 옛 노래들을 원곡 그대로 부른다.

우리는 참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표준어에 미쳐 시어들을 모두 현대 표준어로 바꿔 놓아야 속이 시원하다. 가령 이은상의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사랑>이란 노래는 이은상이 경상도 말로 쓴 아름다운 시어로 가득 찬 노래이다. 이걸 기어이 죄다 현대 표준어로 바꿔 한 예로 ‘생낙으로 잊으시오’라는 원문을 ‘생나무로 잊으시오’라고 고쳐 부른다. 노래에서 ‘생낙’이 아니라 나무젓가락 씹는 맛이 난다. 멋을 모르는 획일화의 세상이다. 주현미의 <목포의 눈물>은 1930년대 표기 그대로 불러 더욱 정겹다.

1975년 김시스터즈는 영광의 세월을 뒤로 하고 은퇴했다. 막내 민자가 헝가리 출신의 토미 빅(Tommy Vig)과 결혼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토미 빅은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 음악을 다수 작곡한 작곡가이며 유명한 퍼커셔니스트이다.

민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계속해서 미아 킴(Mia Kim)이라는 이름으로 남편과 음악 활동을 하다 현재는 헝가리로 이주해 여전히 남편과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애자는 1987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시스터즈 중 숙자만이 남편과 함께 라스베이거스에 남아 있다. 김시스터즈의 형제들로 구성되어 역시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했던 김브라더즈와 다른 형제, 자매들도 모두 라스베이거스에 모여 집성촌을 이루고 산다. 싸이‧보아‧BTS에 앞서 한류 개척한 가수들


1년쯤 전에 대학생들 몇 명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류의 원조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싸이도 나오고, 비에 보아까지는 갔는데 “또?” 했더니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젊은 세대는 모르지만 보아 이전에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 김시스터즈, 윤복희, 패티김이 미국으로 건너가 길을 닦았다.

유럽에는 1970년대부터 아리랑싱어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 후에 그룹 이름을 바꿔 ’88 올림픽 주제곡인 <손에 손잡고>를 부른 코리아나가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인들이 아시아가 하나의 큰 나라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김시스터즈의 《에드 설리반 쇼》 영상을 보면 한복도 자주 입고 나오지만 중국 인형처럼 꾸미고 나올 때가 많다. 미국인의 지식의 폭 안에서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양인들의 한계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미국 안방극장에 소개하고 미국 텔레비전에 나와 ‘우리나라 김치깍두기’하고 목청껏 노래하는 스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을 가난과 싸우면서 남의 나라에서 남의 말로 이뤘다.

방탄소년단이 꿈에 그리던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세상에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오늘날 방탄소년단의 영광의 초석이 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는 똑같이 반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패턴이 늘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다. 힘든 시절 돌고 돌아갔던 그들의 고된 길을 들여다보면 오늘을 위한 지혜가 보인다.

이난영은 전후 처참한 가난 속에서 어떻게 미국 팝 시장의 흐름을 읽어냈는가. 10대 소녀 셋을 에이전트 따라 떠나보내는 모험을 어떻게 감행할 수 있었나. 왜 다른 가수들은 그런 기회를 잡지 못했나. 그런 기회가 와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왜 그랬나. 역사는 수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오늘날 앞에 K자 들어가는 모든 것이 세계적인 관심을 끈다. 앞서 길을 개척한 선배들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우리의 앞길을 개척한 분들이다.


김시스터즈가 부른 '김치 깍두기'.

바버렛츠가 부른 '김치 깍두기'. EBS스페이스공감


글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미국을 열광시킨 원조 걸그룹! / kbc광주방송 지식통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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