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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사라진 금혼 크루즈 여행

  • 작성자 사진: senior6040
    senior6040
  • 2020년 9월 4일
  • 3분 분량

[LA중앙일보]발행 2020/09/04 배광자 / 수필가


"서로의 인생을 섞어 반 백년의 긴 세월을 함께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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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안방극장을 들썩이게 했던 ‘부부의 세계’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했다. 처음부터 본 게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서 한꺼번에 몰아서 봤다. 시작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키더니 근래에 드문 높은 시청률과 많은 화제를 남기고 종영했다고 하도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려 찾아본 것이다. ‘부부의 세계’는 영국 B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닥터 포스터’를 리메이크한 국내 제작 드라마다.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믿었던 여의사가 남편의 배신 이후 이혼을 하고 애증 속에서 서로의 목을 조이는 이야기다. 한 번 맺은 부부의 연은 7000번을 다시 태어나도록 이어진다고 한다. 이혼을 했다고 해서 환부를 도려 내듯이 깔끔하게 끊어지는 게 아니다. 부부의 연이란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보통 결혼 발표를 할 때 ‘백년가약을 맺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젊은 남녀가 부부가 되어 평생을 같이 지낼 것을 굳게 다짐한다는 뜻이다. 평생을 함께 하자는 아름다운 약속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약속이다. 결혼은 때로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고 뒤집히고 깨지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5일은 우리 결혼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남산에 있는 드라마센터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년이 지났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큰 아들이 우리 50주년 기념선물로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선물해 주었다. 코로나가 평범한 일상을 삼키지 않았다면 나와 남편은 지금쯤 초호화 크루즈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을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지난 50년의 세월을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 몇 달째 좁은 집에 갇혀 지내니 답답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지친 심신을 훌훌 날려버릴 좋은 기회인데 코로나가 더욱 원망스럽다. 금혼식 대신 조촐하게 가족이 모여 기념사진이라도 찍어 남기고 싶었지만 그마저 사진관이 셧다운으로 문을 닫아 할 수 없었다. 겨우 뒤뜰 오렌지 나무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사진 속의 두 노인을 보며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들어 서로의 인생을 섞어 반 백 년의 긴 세월을 함께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찼다. 남들이 보기엔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 것 같은 삶이었다. 50년이란 세월이 어찌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호수같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남편이 한참 왕성하게 일하던 젊은 시기에는 대부분의 한국 직장 남자들의 귀가 시간이 늦었다. 상사 눈치 보랴, 동료들과 술 한잔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거나, 하여간 집으로 곧장 퇴근하기보다는 밖에서 좀 더 자유를 누리다 밤 늦게야 집에 들어왔다. 특히 남편은 새벽별을 보고 출근했다가 밤하늘의 별을 보고 귀가하는 언론인이었다. 가정보다는 직장과 사회생활에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얼굴 마주보며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남편은 대가족의 장님인지라 시부모님과 시누이들, 시동생에, 외국에 사는 시누이가 시어머님께 맡긴 조카딸까지 한 집에 살았으니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그때그때 이야기를 풀어 놓아야 해소가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 불만이 쌓여갔다. 아마도 싸울 시간이 없어서 헤어지지 못하고 그냥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88 서울 올림픽이 끝나자 남편은 미국에 있는 현지 자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들 둘만 데리고 네 식구가 LA에 도착했다. 출퇴근 시간이 명확했고 부부가 함께하는 문화 속에서 남편과 오붓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서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4년의 임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 남편은 아이들과 나만 남겨 놓고 홀로 한국으로 들어 갔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아직도 낯 설은 땅에서 여자 혼자 두 아들과 지내기란 녹녹하지 않았다. 방문을 닫고 애들 몰래 혼자서 운 때가 많았다. 그런 어려운 고비를 잘 견뎌냈고 그 결과로 내 어깨에는 훈장이 주렁주렁 달렸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보면 그래도 그때가 우리에게 참 좋은 시절이었다. 은퇴 후 남편은 그동안의 소홀함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내게 과잉 충성이다. 특히 요즘 코로나 사태로 외식도 할 수 없고 꼼짝없이 부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신경을 많이 써 준다. 매일 아침상을 차려 주고 식사 후에는 모닝커피까지 대령한다. 점심에는 가끔 특식으로 파스타도 해주고 김밥도 싸주는데 보통 솜씨가 아니다. 맛도 좋거니와 모양도 예쁘다. 왜 일류 요리사가 남자인지를 알 것 같다. 다시 사진을 들여다본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오랜 세월 지지고 볶으면서 미운 정 고운 정 쌓으며 살다 보면 서로 닮는 모양이다. 부부 사이란 때론 너무 허물없이 편하다 보니 함부로 대하기 쉽다. 그러나 가까운 사이에도 서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담장 고치기'라는 시에서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고 말한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완벽했던 가정이 무너진 것은 먼저 남편이 지켜야 할 담장을 허문 데 있다. 한편 아내는 스스로 완전한 담장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한 것이 원인이리라. 담장은 수시로 돌보며 수선을 해야 튼튼하고 안전하다. 무엇보다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힘은 많은 인내라고 생각한다. 요즘 나이 먹어 힘이 없어지니 서로 기대어 아껴주고 보듬어 준다. 앞으로 얼마를 더 함께 살지는 모르겠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요즘만 같기를 바란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8626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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