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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주최 사랑의 손편지 행사] “가족 사랑의 의미 되새긴 시간”

  • 작성자 사진: senior6040
    senior6040
  • 2020년 7월 24일
  • 3분 분량

[애틀랜타 중앙일보]발행 2020/07/24


손편지 선정자 초청 좌담회 개최

김기수·김성혜·김훈철·실비아 박


낮에는 서빙, 저녁엔 캐시어 …

50년 만에 쓴 편지에 '사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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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손편지’ 행사의 당첨자들이 지난 20일 둘루스 사옥을 방문해 김영환 대표와 한자리에 섰다. 사진 왼쪽부터 김훈철, 김성혜, 김영환 대표, 김기수.



본지가 지난 5~6월 실시한 ‘사랑의 손편지’ 행사 선정자들을 초청, 지난 20일 둘루스 사옥에서 소정의 상품권을 제공하고 좌담회를 나눴다. 본지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애끓은 사연을 쓴 김기수, 50년 만에 아내에게 편지를 쓴 김훈철, 아흔 넘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 김성혜, 그리고 해병대 장교로 임관해 훈련을 받고 있는 아들 영준이에게 편지를 쓴 엄마 실비아 박 등 4편의 손편지 주인공을 선정했다.


좌담회에는 김기수, 김성혜, 그리고 김훈철 등 3명이 참석했다. 손편지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손편지를 쓰면서 또 신문에 게재된 편지를 읽으면서 가족 간의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긴 소중한 시간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좌담회 내용을 정리했다. 김영환 대표가 좌담회 사회를 봤다.


▶김영환 대표(이하 김영환)= 의외로 많은 분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신문에 게재한 독자들의 반응을 고려해 기자들이 선정한 손편지의 주인공 네 분을 초청하게 됐다. 급성 골수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김기수 님의 글이 가슴에 남았다. 손편지를 쓰면서 어떤 마음이었나. 어머니는 어떤 분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김기수= 어머니는 ‘고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엄마가 늘 더 챙겨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1984년도 8월 4일에 하츠필드 공항에 내렸다. 사우디, 레바논 등에서 해외생활을 했는데 해외에서는 늘 어머니가 그리웠다. 미국에 올 때는 어머니가 건강하셨다. 5식구가 48달러를 들고 도미했다. 6개월이 지났는데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돈이 너무 없어서 한국의 입양아를 데리고 들어오는 조건으로 비행기 표를 구해서 한국에 갔다. 병원에서는 어머니가 며칠 못 사신다더라.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 골수암이니 다리에 있는 혹을 자르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를 마다하셨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자신을 못 알아볼까 두렵다고 하셨다. 입양아들을 데리고 미국에 온 뒤 부고를 들었다. 어머니 연세가 70세였다. (울먹이면서) 참 원망스러웠다. 지금도 늘 엄마의 고향 같은 품과 투박하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 손맛이 그립다.


▶김영환= 김훈철 선생님은 아내에게 50년 만에 편지를 썼다는데, 편지 한번 쓰는데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 궁금하다. 아내분께 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김훈철= 나이가 어느새 70이 넘었다. 사실 편지를 써놓고도 (중앙일보에) 부치기만 했지, 손편지를 썼다고 이야기도 안 했다. 신문에서 손편지를 공모한다는 내용을 봤는데, 뒤돌아서 생각해보니 아내에게 미국에 온 후로 한 번도 편지를 써본 적이 없더라. 그게 벌써 50년이 됐다. 그래서 바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보내놓고는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신문에 나더라.

아내와는 연애결혼을 했는데, 내장산이 있던 고향에서 만났다. 친구 여동생과 함께 있는 20살 남짓한 아내를 처음 보고는 참 이쁘다고 생각했다. 친구를 통해 주소를 알아보고는 아침, 저녁으로 엽서를 띄웠다. 무슨 일이 있어서 서울에 가면, 서울에서도 엽서를 띄웠다. 3년이나 이렇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결혼한 후 3년 만에 미국에 왔다. 미국에서는 아내가 한국을 참 그리워했다. 첫 아이를 처가에 두고 왔는데, 보고 싶었는지, 향수 때문이었는지 매일 우는 아내에게 무척 미안했다. 악착같이 일만 했다. 한 달에 하루만 쉬고 일했다. 아내는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중국 식당에서 낮에는 서빙하고, 저녁에는 마트에서 캐시어를 했다. 참 마음이 아팠다. 그동안 마음을 담은 편지한 번 못 써준 게 못내 미안했다. 참 미안하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다.


▶김기수= 아내에 대한 사연은 나도 있다. 미국에 온 지 2년 만에 그로서리 2개를 운영하게 됐는데, 일이 있어서 먼저 일터를 나온 날이 있었다. 딸아이가 갑자기 전화하더니 울면서 “엄마가 총에 맞았어”라고 하더라. 머리가 멍했다. 그리고는 딸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엄마 죽었어?”


왜 그 말이 먼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차로 달려 그레이디 병원으로 향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차가 안 나가는 기분이었다. 병원에 갔더니 아내가 붕대를 감고 앉아있었다. 흑인 강도가 쏜 총알이 목에 스친 것이었다. 조금만 잘못 맞았으면 죽었다고 의사가 말하더라. 뒤돌아서 생각하니 당시에 왜 엄마가 죽었냐고 물어봤을까 싶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을까 싶다. 아내는 괴팍한 성격의 남편을 만나서 뒷바라지만 했다. 지금은 손주가 7명이나 된다. 이 힘든 여정을 같이 걸어와 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아내가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줬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 가정을 일궜다고 생각한다.


▶김영환= 김성혜님이 아버지와 나눈 손편지는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편지를 쓰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김성혜= 남편 유학 때문에 도미했다. 1년 반 동안 자녀와 친정에서 살다가 1971년도에 미국에 왔다. 1974년에 남편이 공부를 마친 뒤 한국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나서 지금까지 미국에 있게 됐다. 지금처럼 한국인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매주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대표로 아버지가 보내줬는데, 편지를 매번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손편지를 쓰면서 참 외로운 시절에 가족의 안부를 주고받던 소중한 추억이 떠올랐다. 아울러 아버지가 보내줬던 편지 내용도 새록새록 기억이 나는데 모든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연세가 벌써 아흔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계신다. 아버지에게 애틀랜타에는 식품점이나 식당 등에서 중앙일보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참 좋아하셨다. 중앙일보 애독자다.


▶김영환= 중앙일보에 대한 느낌과 의견도 말씀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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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수기에 당첨된 뒤 중앙일보 사옥을 방문한 김성혜(왼쪽)씨 가족. [사진 김성혜 씨]



▶김성혜= 오하이오에서 은퇴하고 애틀랜타에 온 지 7년 됐는데, 신문을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하고 좋다. 미국의 노년 생활에 따끈따끈한 신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보너스가 아닐까. 특히 중앙일보와는 인연이 있다. 1976년에 일리노이주에서 살았는데, 그때 중앙일보에서 제1회 자녀교육 주부 수기를 공모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그걸 보고는 가슴이 뛰어서 수기를 써서 보냈는데 덜컥 당첨됐다. (그는 당시에 중앙일보 사옥을 방문해 찍은 사진도 보여줬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김영환= 감사드린다. 계속 지역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정보와 읽을거리가 가득한 신문을 잘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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