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홍](5) 한인 기업 키워 은행도 크는 동반성장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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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2월 10일
- 3분 분량
[LA중앙일보]발행 2020/12/10 진성철 기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한인은행의 '처음' 벤자민 홍 잠재력 높은 업체들 발굴해 컨설팅 역할 실적 좋아지자 일부 이사들과 갈등 커져

벤자민 홍 전 행장은 거래가 없던 한미은행의 주식을 장외에서 사고팔 수 있도록 하면서 주가 상승에 크게 기여했다. 홍 행장(오른쪽)과 김선홍 전무가 장외거래 1개월 만에 주가가 14.3% 상승했다고 밝히고 있다.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벤자민 홍 전 행장은 한미은행을 빠르고 탄탄하게 성장시키며 승승장구했다. 그는 고객에게 그 공을 돌리지만, 그에게 더 큰 감사함을 표하는 이들도 많다.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홍 행장의 비즈니스 컨설팅과 멘토링이 영세했던 고객 업소를 기업으로 변모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멘토가 되다 홍 행장은 비즈니스 인큐베이터와 액셀러레이터의 역할을 동시에 했다. 성장 가능성이 큰 업체를 발굴해 비즈니스 스킬, 대출 지원, 경영 멘토십 등을 무료로 해주었다. 현재는 컨설팅 업체가 돈 받고 해주는 일이다. 어느 정도 기업의 면모를 갖춘 한인 업체에는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업 및 조직 운영과 성장 전략 등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경영 멘토링으로 대성한 기업인도 꽤 된다. 한 한인 기업가는 “경영기법을 익히기 쉽지 않았던 시절에 홍 행장은 기업을 인큐베이팅하듯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과 지원으로 걸음마를 하던 유아를 뛸 수 있는 기업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은행 본점을 윌셔불러바드로 옮기며 급성장을 알린 홍 행장은 일부 이사들과의 마찰로 6년 만에 한미와의 인연을 끝맺었다. 김상진 기자
그의 이런 멘토십은 과거 최대 은행 중 하나인 방콕뱅크의 창업자 친 소폰패니치 회장과의 만남에서 배우게 됐다. 은행의 급성장 비결에 대한 질문에 친 회장은 “성공한 기업을 쫓아다니지 말고 성공 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미 성공을 이룬 기업에 은행이 해줄 역할이 많지 않지만, 성공 잠재성이 큰 기업을 지원하면 은행이 그 기업과 동반 성장할 수 있다는 조언이다.
홍 행장은 그의 조언을 은행 경영의 신조로 삼았다. 그런 신조 덕에 업소의 주인을 컨설팅해주며 기업의 대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조력자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그는 “3 플러스 로지스틱스 그룹의 김영석 회장과 터보에어의 브라이언 김 회장 모두 한미 시절 중요한 고객”이라며 "그들과는 지금도 연락하며 안부를 묻는 사이”라고 말했다.
▶성장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감독기관의 행정제재가 풀리고 은행의 실적이 좋아지자 이사들 사이에서 홍 행장파와 반대파로 나뉘었다. 반대파 이사들은 홍 행장의 좋고 싫음이 분명한 직설적 화법과 홍 행장 영입 조건 중 수익공유(revenue sharing)와 스톡옵션을 거슬려 했다.
“행장 영입 제안 시 노스롭 금융부장 시절의 절반도 안 되는 연봉을 제시했습니다. 연봉은 제 가치입니다. 이를 50%로 줄이는 것은 제 가치를 깎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정을 말하자 이사들은 스톡옵션과 수익공유로 부족분을 채우자고 제시했고 이에 합의했습니다. 스톡옵션도 당시 가치가 10달러였던 것을 은행에 유리하게 12달러로 올려서 한미은행장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더욱이 홍 행장은 거래되지도 않았던 한미은행 주식을 수트로 컴퍼니를 통해 장외에서 사고팔 수 있게 했다. 이후 한미은행 주가는 빠르게 올랐다. 거래 한 달 만에 14.3%나 뛰었다. 주가 급등으로 이사들은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었음에도 행장이 받는 돈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우스갯소리라며 홍 행장은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당시 친했던 대만계 은행인 제너럴뱅크의 리페이 우 행장과 LA다운타운 옴니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차를 기다리는데 롤스로이스 한 대가 (우리 앞으로) 왔습니다. 기사가 차 문을 여니 그가 그 차로 걸어갔습니다. 차에 관해 물었더니 은행 이사회가 호실적을 거뒀다며 롤스로이스를 선물로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행장은 차가 커서 운전을 하지 못하겠다며 고사했더니 운전기사까지 내어줬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행장은 물이고 이사회는 물을 담는 그릇이란 걸 깨달았다”며 무릎을 ‘탁’ 쳤다. 위기에 놓인 은행의 행장으로 스카우트할 때는 이익공유와 스톡옵션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이사들이 살 만해지니 얼굴을 180도 바꾸었다고 회고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이 떠올랐다고.
이사회가 행장을 믿고 뒷받침해주어야 더 열심히 뛰어서 그들의 이득을 더 늘릴 수 있다. 수익을 가져다준 행장을 해고해서 본인들의 이득을 더 챙기겠다는 계산이 참 어리석게 보였다고 전했다.
그러다 은행 감독국이 이사 접대비가 과다하다는 지적에 홍 행장과 이사들의 갈등과 반목은 더 커졌다.
“이사회가 끝나고 저녁 식사 후 2차 술자리를 가게 됐습니다. 소위 룸살롱이라고 하는 데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비용으로 수천 달러가 나왔습니다. 한 이사가 은행경비로 처리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다가 감독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그 이사의 돌아온 대답이 참 가관이었습니다. 한 번 맞아보자는 겁니다. 지난 행정제재로 사지까지 몰려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서 .”
이런 마찰이 이어지면서 홍 행장과 반대파 이사들 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이사들과의 마찰이 그가 한미은행을 떠나는 이유가 됐다. 한미은행 이사들은 1994년 1월 첫 정기이사회를 통해 3개월 임기 만료를 앞둔 홍 행장과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6년 만에 홍 행장과 한미와의 연은 이렇게 끊어졌다.
홍 행장은 “한미은행에서 유능한 후배를 많이 키울 수 있었다는 점은 매우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며 “그때 나이가 61세였다. 쉬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그리고 잠시 쉬려 했던 그에게 벼랑 끝에 내몰린 나라은행 이사들이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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