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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라” “위기 생각하라”… 경종 울린 혁신가

  • 작성자 사진: senior6040
    senior6040
  • 2020년 10월 25일
  • 2분 분량

<조선일보>김강한 기자 석남준 기자입력 2020.10.26


[이건희 회장 별세] 이건희 삼성 회장 (194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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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서울 장충동 자택에서 (왼쪽부터 시계방향)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명희 신세계 그룹 회장,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고 이인희 전 한솔그룹 고문,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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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회장의 예전 명언들과 경영활동을 모은 영상. /삼성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한국 기업을 사상 최초로 세계 1위로 이끌고 우리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재계의 거목이었다. 고인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집중력으로 일이든 취미든 한 가지에 빠지면 끝을 볼 때까지 몰두했다. 이 회장의 이 같은 집중력은 세계 일류를 고집하는 삼성의 DNA로 자리 잡았다.


그는 1942년 대구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아들 중에는 막내였다. 이 회장은 11세였던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일본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한국계 프로레슬러인 역도산을 직접 찾아갈 정도로 레슬링에 푹 빠졌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서울사대부고에 다니며 레슬링부에서 활동했고 2학년 때는 전국 레슬링대회 웰터급으로 출전해 입상했다.


1966년 경영에 참여한 이 회장은 1970년대 미국 실리콘밸리를 드나들며 반도체 산업 진출 목표를 세웠다. 그는 1974년 사재까지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이 결단이 삼성전자를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으로 만든 초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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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올림픽 확정… 李회장의 눈물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11년 7월 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평창의 2018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회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1년 반 동안 170일간 해외 출장을 다녔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 회장이 형들(이맹희·이창희)을 제치고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데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두 형이 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둘째 형 창희씨는 구속됐다. 이병철 회장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한국비료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이후 장남 맹희씨가 그룹 총수 대행을 맡았지만 이병철 회장은 이후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막내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결심한다. 1977년 이병철 회장은 닛케이비즈니스 인터뷰에서 “막내아들이 후계자”라고 말해 후계 구도를 공식화했다. 이듬해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한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 바로 옆방에서 일하며 경영을 배웠다.


고인은 1987년 이병철 회장이 별세한 직후 그룹 회장에 올랐다. 1993년 2월 미국에서 삼성 제품이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는 것을 본 그는 그해 6월 독일 출장 중 서울로 전화해 사장과 임원 전원과 해외 주재원 등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켰다. 이 전화 한 통이 삼성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며 신경영을 선언했고, 이 발언은 삼성을 넘어 한국 경영사를 바꾼 획기적인 전기(轉機)가 됐다. 그해 삼성전자 제품 불량률은 전년 대비 30~50% 줄었다.


이 회장은 “진정한 위기의식은 사업이 잘되고 업계 선도의 위치에 있을 때라도 항상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라며 ‘차원높은 위기의식’을 가져달라고 수차례 당부했다. 2002년 4월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5년에서 10년 후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고 했다.


이건희 회장은 공식적으로 두 번 눈물을 흘렸다. 2008년 비자금 조성 혐의로 기소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 회장은 “삼성전자에서 나오는 제품 중 11개가 세계 1위인데 1위는 정말 어렵다. 그런 회사를 만들려면 10년, 20년 갖고는 안 된다”고 말을 이어가다 목이 메었고 끝내 눈물을 흘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도 일하던 2011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자 눈물을 흘렸다.


이 회장은 1990년대 말부터 건강 문제로 시달렸다. 1999년 11월 폐 림프암이 발병해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6년 5개월 와병 끝에 25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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