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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칼럼] 晩秋의 주제곡 ‘최재형·윤석열 현상’

  • 작성자 사진: senior6040
    senior6040
  • 2020년 11월 14일
  • 2분 분량

<조선일보>류근일 언론인 입력 2020.11.14


적폐와 농단은 우파만의 舊惡이 아니라 좌파의 新惡이기도 하다 ‘우린 진보니까 괜찮다’ 한다면 그거야말로 내로남불 최재형·윤석열 감사·수사 적중하면 진보의 실패 인정해야 한다


2020년 만추(晩秋)의 주제곡은 이브 몽탕의 ‘고엽’이 아니라 최재형 감사원장이 검찰에 넘긴 원전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수사 참고 자료’였다. 그리고 그걸 받아보고 한수원·산업부·가스공사를 압수 수색한 윤석열 검찰총장의 서릿발이었다. 이 두 공직자의 듀엣을 들으니 1992년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마니 풀리테(Mani Pulite, 깨끗한 손)’ 사태를 연상하게 된다. ‘마니 풀리테’는 밀라노 검찰청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를 두고 한 말이다. 뇌물 혐의로 구금된 피의자의 제보에 따라 그는 당시 연립 여당이던 이탈리아 사회당 소속 정치인 마르코 키에사를 구속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11월 8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오른쪽으로 윤석열 검찰총장,은성수 금융위원장, 최재형 감사원장등이 있다./연합뉴스



이 사건은 발생 2년 만에 1948년 성립한 이탈리아 제1 공화국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엄청난 파국으로 번졌다. ‘탄젠토폴리(뇌물의 도시)’라는 이름으로도 부른 이 사건에선 4500여 명이 체포돼 1200명이 기소되었다. 국회의원 절반이 걸려들어 더러는 자살도 했다. 보수만 썩었다고 하더니 진보도 썩었다. 부패 정치인들과 공생하는 마피아가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나 피에트로 검사는 수사를 소신껏 밀어붙였다. ‘마니 풀리테’ 25주년에 그는 언론에 이렇게 술회했다. “전엔 도둑과 경찰의 전쟁을 바라봤는데, 요즘엔 도둑 떼와 도둑 떼의 전쟁을 바라보는 것 같다.”


최재형 감사원장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역할을 ‘마니 풀리테’와 성급하게 동일시할 시점은 아니다. 수사와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뭐라 예단할 순 없다. 다만 주목할 포인트는 있다. 지난 1년을 장식한 철판 깐 스캔들과 게이트를 계기로 한국 정치의 쟁점이 또 한 번 재설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의 쟁점은 지난 7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바뀌었다. 자유당 시절엔 권위주의 보수 여당이냐 자유주의 보수 야당이냐가 쟁점이었다. 3·4·5공화국 때는 근대화·산업화·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이 초점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보수·진보·우파·좌파 쟁점이 생겼다.


이 이념적 심화 과정에서 확증 편향이 하나 생겼다. “우리가 정의를 대표한다”고 한 운동꾼들의 도덕적 우월감이 그것이다. 그러나 2020년 만추의 시점에도 그들은 계속 “우리가 정의를 대표한다”고 자처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이탈리아의 ‘탄젠토폴리’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적폐와 농단은 우파만의 구악(舊惡)이 아니라 좌파의 신악(新惡)이기도 하다. 신악을 저질러놓고도 우린 진보니까 괜찮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내로남불이다.


그렇다면 보수도 진보도 차례로 때를 묻힌 오늘의 하향 평준화 세상에선 무엇으로 권력 투쟁과 문화 전쟁에서 다툴 시대적 쟁점을 만들어낼 것인가? 억지·궤변·독설, 말도 아닌 말, 논리 장난은 치워야 한다. 그 대신 이젠 예컨대 최재형 감사원장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제기한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과정의 ‘범죄 개연성’이라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철저한 ‘팩트 체크’로 다투는 방식을 가져가야 한다. 그래서 최재형·윤석열 감사·수사가 적중하면 보수뿐 아니라 진보 일부도 진보의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반대로 적중하지 않으면 진보뿐 아니라 보수 일부도 보수의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이러면 ‘오늘 이곳’의 경찰은 누구이고 도둑은 누구인지도 국민적 합의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이 시국의 쟁점이다. 그러나 이러려면 좌도 우도 ‘닥치고 집단체조’에서 벗어나 영롱한 개개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최재형 감사원장은 “외부 압력에 순치(馴致)된 감사원은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흰 것을 희다고 하고, 검은 것을 검다고 해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를 눈치 보지 않고 수사하는 게 검찰 개혁” “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했다. 200명이 넘는 일선 검사는 “정치가 검찰을 덮었다” “무서워서 말도 못 하는 세상이 온 것 같아 슬프다”고 했다. 모두가 개개인의 자발적 양심 고백이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현상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유사 전체주의, 포퓰리즘, 중우정치라는 문화혁명 3종 세트로 무너지고 있다. 전문가가 배제되고 운동꾼들이 차(車) 치고 포(包) 치는 세상이다. 이래서 요즘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우울증 같은 게 꽤 퍼져 있다고 한다. 야당다운 야당이 있으면 이 가슴앓이를 떠안아 치고 나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최재형·윤석열·검사들의 양심 고백은 그래서 야당의 그런 한계를 대신 보상해준 셈이었다고 하면 맞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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