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희생양 만든다고 금감원 책임 없어지나
- senior6040
- 2020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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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나지홍 기자 입력 2020.11.10
사모펀드 피해 6조원대 된 건 금융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 탓 美 스리마일 원전사고 흡사… 사소한 실수 누적이 재앙 불러
1979년 3월 미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에서 방사능이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방사능 누출량이 적어 민간인 피폭 피해는 없었지만, 인근 주민들이 긴급 대피하는 등 공포에 떨었다.
카터 대통령 지시로 꾸려진 정부 조사단의 조사 결과는 의외였다. 사고 원인이라 할 만한 ‘결정적 한 방’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엔 원자로 냉각수 필터에 불순물이 끼어 냉각수 공급이 멈췄다. 종종 발생하는 일이어서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비상 냉각수 펌프도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이틀 전 보수 작업을 할 때 잠근 펌프 밸브를 열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밸브 개폐 여부를 알려주는 계기판은 점검 기록표로 덮여 있었다.
이런 각각의 잘못은 평소 같으면 별문제가 안 됐던 것들이다. 하나가 잘못돼도 다른 안전장치들이 작동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겹겹의 안전장치가 모두 작동하지 않아 사고가 난 것이다.

참여연대,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금융정의연대 관계자들이 지난 10월 28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본원 입구에서 '펀드 사기 키운 금감원에 대한 공익감사 청구 진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시스
당시 조사단에 참여한 찰스 페로 예일대 교수는 이를 ‘정상 사고(Normal Accident)’라고 명명했다. 시스템이 복잡해지면 결정적 잘못이 없더라도 사소한 실수가 겹쳐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상적 상황에서의 사고 가능성을 강조하려고 정상 사고라는 명칭을 썼지만, 시스템이 복잡해지면 필연적으로 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시스템 사고’라고도 부른다.
딱히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매도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시스템에 참여한 누구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시스템 사고 이론의 메시지다. 이 이론을 적용하면 6조원대의 고객 투자금을 전부 또는 일부 날리게 만든 사모펀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모펀드는 높은 수익을 추구하지만 그만큼 손실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금융 지식이 풍부한 전문 투자자에게만 팔도록 규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엔 사모펀드 최저 투자금액이 5억원으로, 문턱이 높았다. 그런데 정부가 사모펀드를 활성화한다며 2015년 이 기준을 1억원으로 낮췄다. 정부가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금융회사 불법행위 감독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한 금융감독원도 마찬가지다. 금융 당국은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통해 옵티머스 김재현(구속) 대표처럼 금융 경력이 없는 사기꾼이 금융회사 대주주가 되는 것을 막지 못한 책임도 있다.
옵티머스 업무를 대행했던 은행은 채권을 판 돈이 입금되지 않는 부도 상황이 세 번 발생했는데도 문제 삼지 않았다. 예탁결제원은 ‘유령 회사’가 발행한 채권 이름을 공공기관 매출 채권으로 바꿔달라는 사기꾼 요구를 들어줬다. 이들 중 한 곳만이라도 제 역할을 했다면 피해가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한국 금융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 빚은 참사다.
파장이 커지자 금감원은 사모펀드를 판 은행과 증권사 쪽으로 칼날을 겨누고 있다. 이미 DLF(파생결합펀드) 사태로 은행 2곳 CEO와 임직원이 중징계를 받았고, 라임을 판매한 증권사 3곳에 대한 징계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런 식이라면 부실 사모펀드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은행·증권사 전·현직 CEO 수십 명이 징계를 받게 된다.
자신이 파는 상품이 불량 식품인지도 몰랐던 판매사는 이번 사태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금감원이 자기들 책임을 덮으려고 은행과 증권사만 희생양으로 만든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페로 교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인적 책임보다 중요한 것이 제도적 개선”이라고 했다.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고 희생양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실 대응은 오히려 더 큰 사고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감원이 새겨듣길 바란다.
나지홍 기자 IMF 위기 때 조선일보에 입사, 사회부와 편집부 등을 거쳐 2002년부터 경제부 기자로 근무했습니다. 도중에 뉴욕특파원과 사회부 기동팀장(시경캡) 등 잠시 경제부를 떠나있던 적도 있지만, 기본 마인드 디폴트가 경제부로 세팅돼있습니다. 효율과 형평이 상충되는 가치가 아니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보다 소통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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