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 없이도 친절 베푸는 ‘보통 사람’이 진짜 히어로”
- senior6040
- 2020년 10월 11일
- 2분 분량
<조선일보>백수진 기자 입력 2020.10.12
10년 전, 정세랑(36) 작가는 낮에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 체력이 달리자 ‘투잡’으로 힘들어하는 캐릭터를 떠올렸다. 그해 보건교사가 남들 몰래 퇴마사로 일하며 해로운 존재들을 물리치는 단편 ‘사랑해 젤리피시’를 발표했다. 직장인 히어로 ‘안은영’의 탄생이었다. 단편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2015년 장편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확장됐고,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넷플릭스 순위 지표인 ‘오늘의 한국 톱 10 콘텐츠’ 상위권을 유지하며 화제가 되고 있다. 원작 소설도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주인공 안은영은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젤리’를 볼 수 있다. 학교 곳곳에 찐득찐득 붙은 젤리 때문에 괴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안은영은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젤리를 물리치며 아이들을 지킨다.

정세랑 작가는 “문학계에선 너무 가벼운 문학을 한다고 은근히 배제되는 편이었는데, 영상계에선 환영해줘서 좋았다”면서 “그래도 작은 디테일까지 장악할 수 있는 소설이 제일 좋다”고 했다. /넷플릭스
역사교육을 전공한 정세랑은 교직에 있는 친구들의 “심드렁하게 심지 있는” 모습을 안은영에게 불어넣었다. “무심한 직장인인 듯하지만, 학생들에게 애정이 있는 모습이 멋져 보이더라고요. 은은하게 오래 타는 열정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는 “선생님들이 매일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싸우고 있다는 생각으로 만든 캐릭터”라며 “미성년자를 보호하고 시민으로 빚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이들에게 경의를 바치고 싶었다”고 했다.
끈적끈적한 ‘젤리’는 인간의 욕망이 남긴 흔적이다. 사춘기 아이들의 성욕은 ‘에로에로 젤리’를 뿜어내고, 생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는 악귀도 젤리 형태로 인간에게 들러붙는다. 정세랑은 “어떤 귀신이나 괴물보다 사람들의 이글이글한 욕망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엔 대학 입시나 부동산 이슈처럼 숨어 있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주제들이 있고, 체면 아래에 있던 욕망을 목격하면 섬뜩하잖아요. ”
드라마 대본 작업에도 직접 참여했다. “소설은 시간과 공간을 부드럽고 넓게 펼칠 수 있지만, 영상에서는 압축적으로 써야 했어요. 양쪽의 매력이 다른데 서로 스며들 것 같아요. 올해 소설을 써보니 대화가 엄청 늘었더라고요.”

보건교사 안은영(정유미)은 무지갯빛 장난감 칼로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젤리들을 무찌른다. /넷플릭스
젤리와 싸우는 안은영의 무기는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 “직장인의 가방에 들어갈 만큼 작고 가볍고, 고장 나도 쉽게 교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골랐다. 일명 ‘정세랑 월드’에선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조건 없는 선의(善意)와 만나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그가 생각하는 히어로의 조건은 초능력이나 강력한 무기가 아닌 “약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 이익을 내려놓는 사람,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세계에 친절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이 아주 용감해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 에스컬레이터에 어린이의 옷이 끼었을 때 다른 분들과 함께 엉망으로 넘어져가면서도 아이를 도운 적이 있거든요. 사람들의 그런 부분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정세랑은 지금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보건교사 안은영’뿐 아니라 ‘시선으로부터,' ’피프티피플' ‘지구에서 한아뿐’까지 그의 작품이 골고루 국내 문학 베스트셀러 순위권 안에 자리 잡았다. 최신작인 ‘시선으로부터,’ 속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라는 문장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와 연대하는 의미로 소셜미디어에 활발히 공유되기도 했다. 혐오와 폭력의 세계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에 대해 정세랑은 “오늘과 내일에만 집중하면 절망하고 지치지만, 시선을 미래로 멀리 던지면 계속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목표는 “경계선 너머를 탐험하고 확장하는 작가”다. 그는 “쓰고 싶은 주제에 가장 맞는 양식을 골라 유연하게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진지한 문학만큼이나 가벼운 문학도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가볍고 다정해서 피곤한 날에도 집어들어 읽을 수 있는 문학요.”
배수진진 기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