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말만 요란한 금감원
- senior6040
- 2020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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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이기훈 기자 입력 2020.11.13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안전하다”는 말을 믿고 펀드에 여윳돈을 잠깐 넣어뒀는데, 몇 푼 건지지 못할 상황이 됐다면 어떤 심정일까. 최근 사모펀드 사태를 보면 “기가 찬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희대의 금융 ‘사고’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냥 금융이라는 탈을 쓴 ‘사기극’이었을 뿐이다.
수십, 수백 퍼센트의 고수익을 노리지도 않았는데 졸지에 사기 피해자가 된 펀드 투자자들. 그들에게 금융감독원의 분쟁조정 절차는 한 줄기 빛일 것이다. 개인 자격으로 소송을 걸어본들 대형 로펌의 전관 변호사를 앞세워 자신을 보호하는 거대 금융사를 이기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이기더라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소송보다는, 금감원이 금융사의 과실 비율을 정해주는 분쟁조정 절차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금감원 분쟁조정의 ‘말발’이 예전 같지 않다. 금융사가 금감원 분쟁조정 권고를 거부하거나,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데 시간을 끌어 금감원을 애태우는 일이 자주 나오고 있다. 금융 당국 스스로 “요즘 금융사들이 우리 말 듣느냐. 우리가 을(乙)”이라고 하소연할 정도다.

금감원
이에 대한 금감원이 꺼낸 해법은 ‘채찍’이다. 윤석헌 금감원장은 “분쟁조정 결정을 금융사에 강제하는 제도 개편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분쟁조정 결정을 거부하는 금융사는 평가 시 불이익을 주겠다고도 했다. 반쯤 협박에 나선 셈이다. 금융사·소비자 모두 자발적으로 동의해 ‘재판상 화해’ 효력을 내는 분쟁조정 제도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
금감원은 채찍을 들기에 앞서 ‘누가 분쟁조정의 권위를 떨어뜨렸을까’를 자문해야 한다. 윤석헌 원장은 취임 이후 2013년 대법원 확정 판결로 끝난 키코(KIKO)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 분쟁조정에 부쳐 금융권의 조롱을 자초했다. 심지어 국책은행인 산업은행마저 ‘키코 피해 기업에 배상하라’는 권고를 무시했을 정도다.
라임 사태가 터진 뒤에는 전례 없는 조치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 7월 라임 무역금융펀드 판매사에 사상 초유의 ‘투자금 전액 반환’ 권고를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펀드 손실이 확정되지 않더라도 ‘손실 추정액’을 기준으로 분쟁조정을 하겠다고 한다. “손실 확정 이전에는 분쟁조정이 불가능하다”는 그 동안의 원칙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금감원이 초법적인 권고를 내놓을 때 금융사들은 “법적 근거가 있느냐”고 수군거린다. ‘과도하다’는 여론이 오히려 분쟁조정 권고를 무시할 명분이 되는 셈이다.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찾는 노력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금감원 분쟁조정 결정은 철저히 법과 원칙에 기초했다는 명분을 갖출 때 가장 강력하다. 굳이 팔을 비틀지 않더라도, 너무 맞는 말이라 금융사가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분쟁조정 결정을 보고 싶다.
이기훈 기자 열심히 공부하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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