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가해자 감싸는 성희롱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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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1월 2일
- 2분 분량
<조선일보>유소연 기자 입력 2020.11.02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예방하려면 오해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게 좋다.’

성희롱 성폭력 예방. /일러스트=정다운
올해 초까지 교육 공무원 연수기관인 중앙교육연수원에서 쓰였다는 성희롱 예방 교육 교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피해를 막으려면) 정중함이 내포되어 있는 경어(존댓말)로 대응함으로써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라’면서 마치 직장 동료 간에 친근감을 표현해 빌미를 준 것처럼 지적한다.
직장 내 성희롱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시대착오적 내용들이다. 성희롱 가해자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는 ‘성희롱 발생 전 스스로를 제어하라’ ‘이성과 대화 시 어떤 소재로 대화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좋은지 미리 연습하라’ 등을 예방법이라고 제시한다. 교재만 보면 가해자가 우연히, 실수로, 몰라서 성희롱을 저지르는 것 같다. 지난해 1월부터 강의가 중단된 올해 3월까지 1년 2개월간 교원과 공무원 등 3만4000여 명이 이런 교재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 교재도 그나마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 전문가 3명이 실시한 내용 심사를 거쳐서 수정된 최종본이라고 한다. 수정 전에는 문제가 더 심각했다. ‘(여성들은) 적극적 직업의식이 없다. 여자니까 그만두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되고 이는 또 다른 성희롱 발생을 가져오게 한다’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성희롱을 당한 여성이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 직장 내 성희롱이 만연하게 된다는 소리로 들린다. 성희롱 피해를 당하고 문제 제기도 못한 채 혼자 고통받는 여성들이 무슨 큰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비난한다.
‘여성 자신의 의식 문제가 성희롱 원인이 될 수 있다. 남성과의 정당한 경쟁을 회피하거나 스스로 여성임을 강조하며 이를 부당하게 활용하기도 한다’고도 했다. 여성이 직장에서 소극적 태도로 일하고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다는 건 그야말로 편견인,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누군가 사적인 자리에서 얘기하더라도 문제가 될 내용들인데, 심사에서 걸러지지 않았다면 성희롱 예방 교육 교재에 버젓이 들어갈 뻔했다.
교사의 일터는 학생들에겐 배움터이기도 하다. 교사들의 그릇된 성 의식을 학생들은 은연중 보고 배울 수 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학교이기 때문에 어떤 직장보다도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런데도 교사와 교육 공무원에게 ‘성희롱 당하지 않으려면 오해받을 일을 하지 말라’는 황당한 내용의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1년 넘게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희롱·성폭력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 어쩐지 익숙하다. 직장 내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자’라는 용어 대신 ‘피해 호소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말을 만들어 붙였던 것이 이 정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랬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유소연 기자 사회정책부에서 교육 관련 이슈를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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