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료가 2배로...노후 어쩌라고” 건보공단 몰려간 은퇴자들
- senior6040
- 2020년 12월 15일
- 3분 분량
정부 올해 법개정… 월세 소득 있으면 건보료 대상 포함
“건보료가 한꺼번에 이렇게 오르는 게 말이 됩니까.”(할머니)
“자료를 못 믿으시겠다면 어떻게 상담합니까.”(직원)
“담당자 나오라고 하세요!”(할머니)

7일 오후 2시 건강보험공단 서울 영등포 남부지사 민원실에서 고성이 오갔다. 자그마한 체구에 허리까지 구부러진 백발 할머니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자 결국 사무실에 있던 담당자가 민원실로 나왔다. 할머니는 “혼자 사는 노인 건보료를 한꺼번에 2배 넘게 올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지만, 담당자는 “저희도 국세청 자료를 그대로 넘겨드리는 것뿐”이란 말만 되풀이했다. 20여 분 만에 할머니는 “말도 안 된다”며 분을 참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대기석의 민원인 20여 명이 무표정하게 지켜봤다. 하지만 그들도 자기 순번에 이르러 일단 상담석에 앉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처럼 언성을 높였다. 지난달 24일 이후 전국 건보공단 각 지사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다.
매년 11월 하순이면 건보공단은 전년도 소득과 재산 등을 반영한 새 건보료 고지서를 보낸다. 그런데 유독 올해는 은퇴 생활자, 자영업자 등 ‘지역 가입자’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집 한 채 외에 다른 소득이 없는 노인들, 은퇴 후 월 90만~140만원 임대료를 받아 생활하던 이들에게 ‘건보료 폭탄’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5월 개정한 소득세법에 따라, 당초 면제였던 ’2000만원 이하 금융·임대소득'에도 지난달부터 건보료가 부과됐다. 게다가 지역 가입자 건보료 부과 기준인 아파트 가격이 급등했고, 정부가 공시지가도 큰 폭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지역 가입자 771만 가구의 올해 건보료 평균 인상률은 9%(8245원)다. 9% 인상을 ‘건보료 폭탄’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건보공단은 주장한다. “가입자 중 47.6%는 보험료 변동이 없고, 18.9%는 보험료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나머지 33.5%(258만 가구)는 단번에 9%보다 훨씬 많이 올랐다는 의미다.
공단 관계자에 따르면 이달 들어 하루에 공단 각 지사로 찾아오는 민원인은 250~300여 명. 이 관계자는 “11월에는 400명까지도 왔다”며 “민원 스트레스로 병원에서 약을 타 먹는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건보공단에 전화를 걸자 “고객님의 예상 대기 순번은 97번째”라는 안내음이 나왔다.
◇무소득자도 공시價 급격 인상, 건보료 부과
건보료 대혼란의 원인은 정부가 가입자들의 ‘재산’과 ‘소득’을 모두 고(高)평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편 결과다. 우선 주택 공시가격이 크게 뛰었다. 은퇴자나 아르바이트 등 자유직 저소득자(연소득 3400만원 이하)는 가족의 직장 보험에 ‘피부양자’ 자격으로 등록될 수 있지만, ‘소득 1000만원 초과에 보유 주택 공시가격 약 9억원 초과’부터는 피부양자 자격이 상실된다. 하지만 최근 집값이 급등한 데다, 정부가 공시가격을 ‘현실화’란 명분으로 크게 끌어올렸다. ‘공시가격 15억원 초과’인 경우에는 소득이 한 푼도 없어도 피부양자 자격이 박탈되며 지역 가입자로 전환된다. 그런 사례가 쏟아졌다.

국민건강보험 서울 중구지사 민원실 모습.
서울 송파구에서 혼자 사는 김모(여·67)씨는 최근 아들에게 “생활비를 월 27만원씩 더 달라”고 요구했다. 소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지난달 건보 피부양자 자격이 박탈되면서 월 27만원짜리 고지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서 물려받은 잠실 주공 5단지 36평 아파트 한 채가 김씨 전 재산이다. 이 아파트 공시지가는 작년 12억8000만원에서 올해 16억원으로 급등했다. 김씨는 “내가 집값 올려달랬느냐”며 “집값은 정부가 올려놓고 너무한다”고 했다. ‘좀 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가는 건 어떠냐’는 질문에 김씨는 “말이 쉽지, 팔 때 세금 내고, 살 때 또 세금 내면 마지막 밑천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건데 당신 같으면 그런 결정을 하겠느냐”고 했다. 지난달 김씨처럼 집값 상승만으로 갑자기 지역 가입자가 된 사람이 1만7041명이다.
◇월 90만원 임대료·이자가 건보료 폭탄으로
2008년 은행에서 은퇴한 이모(77)씨는 건보료가 갑자기 4배로 올랐다. 월 11만7800원이던 게 41만8600원이 됐다. 이씨 수입은 월 200만원이다. 자기 명의 반포 32평 아파트 한 채와 2.5평짜리 상가 한 칸에서 나오는 돈이다. 아들 집에 들어가며 본인 아파트는 보증금 6억5000만원에 전세 줬다. 그걸 은행에 넣고 월 90여만원 이자를 받는다. 상가 월세는 95만원이다. 그런데 이씨가 받던 임대료·이자 수익에 건보료가 새로 붙었다. 이씨는 “은행 이자는 이미 세금을 원천징수하는데, 여기에 또 세금 격인 건보료를 붙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평생 일만 하고 이제 살 만해진 사람에게 국가가 이래도 되느냐”고 말했다.
◇코로나로 직장 잃었는데 건보료 오르기도
코로나 사태 직격탄을 맞고도 건보료는 오히려 더 내는 사람도 많다. 건보료 계산에 반영하는 소득이 ‘전년도 기준’인 탓이다. 영등포구 문래동에 사는 전직 텔레마케터 B(여·60대)씨 부부는 소득이 3분의 1로 줄었는데, 건보료는 87% 올랐다.
올 초까지 B씨 부부는 매달 340만원을 벌었다. 남편 서모(69)씨가 세탁소·오락실로 평생 번 13억원을 은행에 예금으로 넣고 받는 이자 월 140만원에, B씨가 중소기업 텔레마케터로 일하며 월 200만원을 받았다. 그중 100만원은 90세 시어머니 요양원비와 용돈으로 지출하고 240만원으로 생활해왔다. 그런데 회사가 최근 콜센터 인력을 감축하면서 B씨가 일자리를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부터 연간 1000만원 이상 금융 소득에 대해 건보료가 부과됐고, 문래동 집 공시지가도 작년보다 1억5000만원가량 오르면서 자산 평가액이 뛰었다. 서씨는 “남들은 ‘예금 까먹으면서 살면 되겠네’라고 하지만, 우리 처지에선 갑자기 큰 병원비가 나갈 수도 있고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손을 댈 수가 없다”면서 “노후 계획을 나라가 망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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